욕망 대신 인생 구두.

본가에서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
신발을 한 포대 버렸다. 아니 한 포대도 더 넘는다.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면 문이 하나 있다. 신발장으로 불리는 공간이다. 흡사 창고 같은 그곳에는 기나긴 서울 살이를 끝내고 본가로 회귀할 무렵, 아빠와 내가 함께 만든 신발장이 있다. 벽면의 3면을 가득 메운 찬넬 선반을 채운 건 부모님의 신발이 아닌 내 구두들이었다. 사실 본가로 내려올 때도 나는 신발을 꽤 많이 버렸다. 홍대에서 첫눈에 반해 두근대며 구입한 초록색 빈티지 구두도,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큰맘 먹고 장만했던 수제화도.

단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산 구두들이 빛을 본건 겨우 한 두 번.
대게는 본디 생의 목적이 단 하나였던 것 마냥. 신겨지지 않은 채 진열만 되어있었다. 고급 쇼케이스에 가지런히 진열된 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우아한 자태가 아닌. 그저 신발장 한구석에 냄새나는 신발들과 한데 섞여서.

다시 신을 일 없는 게 자명하지만, 언젠가 신을지도 모른다며 기어이 가져왔던 욕망의 구두들은 세 번째 독립이자, 새 집으로 이사 가는 날 모두 버렸다.

그 많던 구두들을 버린 이유는 단 하나.
불편했다.

갓 공장에서 출하된 날 선 구두로 인해 피딱지가 앉고 짓무른 기억이 셀 수없이 많다. 몇 번 신다 보면 내 발과 같이 길들여지는 구두가 있는가 하면, 신을 때마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구두들이 있다. 겉모습만 보고 산 구두들은 모두 신발장 쳐박템이 되어버렸고, 그야말로 예쁜 쓰레기를 산 격이었다.

보기 좋은 구두와 좋은 구두는 다르다.
보기에만 우아하고 세련된 구두는 하루를 망치고 만다. 허리를 꽃꽂이 세우고 걷는 게 아니라 헐떡이는 구두를 질질 끌거나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아 어기적 거리며 걷곤 했다. 구두가 아니라 족쇄였다.

그 날 내가 버린 건 한 포대의 불 필요한 욕망이었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구두의 정의는 달라졌다.
구두에 네비게이션이 달린 것도 아니고 방향감각을 탑재한 것도 아니니, 떠도는 속설처럼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믿지는 않지만.
나를 잘 아는 구두는 나의 하루에 힘을 실어준다는 걸 안다.

쉽게 길들여지는, 내 발에 꼭 맞는 편안한 구두.
어쩌면 우리가 찾는 인생 구두는 그런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