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구두를 신게 되다

우리 집 신발장 구두는 터줏대감 같은 것이었다.
신발 굽이 닳아 버려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구두만큼은 항상 그 자릴 지켰다.
명절날이나 기쁘거나 슬픈 날에 구두는 드디어 바깥세상을 향한다. 그게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 없었다.
다림질 된 정장과 구두의 조합은 일반인을 단 번에 배우로 만드는 묘한 재주를 지닌 것이었다.

어설픈 멋이라는 게 폭발한 십대 때 그 근사함을 내 몸에 덧입히고 싶었다.
신발장에서 답답해할 아버지의 구두가 안쓰러워 보였다는 건 그저 핑계겠지. 답답했을 구두를
바깥 세상으로 인도하여 어울리지 않은 교복에 신었다. 내 것이 아닌 탓에 사이즈는 헐렁했고, 무겁고,
발 아프고, 익숙지 않은. 구두라는 게 뒤꿈치에 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건 그때에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날 근사하게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 불편과 아픔을 꾹꾹 참은 것이다.

구두 신을 필요 없는 곳에 자리 잡아 밥 벌어먹고 산다.
구두 신을 일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구두 신는 날이 나이 들고 보니 자주 생긴다.
기쁜 날엔 밝은 색 넥타이와, 슬픈 날엔 어두운색의 넥타이와 함께.

깔끔하게 다림질 된 정장에 구두를 신으면 나도 근사해 보일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온 힘을 쏟아붓게 되는 평일이 지난 뒤 찾아오는 주말, 구두 신을 일이 없기를 점점 바라게 된다.

남의 잔치에 참석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함께 할 슬픔이 갈수록 버겁다.
깔끔한 정장이고 근사함이고 멋스러운 구두고 모두 필요 없다 느껴진다.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돈도 버니깐 멋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구두를 신으면 근사한 배우처럼 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멀쩡한 겉모습 이면에.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에 남모를 불편함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어른과 구두란, 그런 것쯤 감수해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