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살다보면 인생은 생각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 짧은 31년 인생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조금은 민감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나는 신이란 없다는 걸 자아라는게 생길때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었다. 교회다니는 아이들을 딱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교회에 가지 않으면 죽어 지옥에 갈 것이 확실하다며 전도하려는 아이들이 나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수자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그래서 어려서부터 길러졌던 듯 하다.

좌우간 나는 딱히 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 아주 철저한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원래 종교가 불교여서 그런것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원리적으로는 철저하게 무신론이니까. 때문에 나이가 조금 들었을 때도, 불교계에서 큰스님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가끔 천주교의 성당에 가서(불교와 천주교는 사이가 아주 좋다) 강연을 할 때 별 무리없이 ‘하나님’을 인용해서 말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원리적으로 보면 내가보기에 신이라는 개념은 불교에 아예 없는 개념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진리’에 대입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지? ‘하나님’이 불교, 혹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에 대입될 수 있는 것인가?

강조하고 싶지만 이것은 간증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민감한 이야기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제목으로 뽑았던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항상 독서에 목이 말라 있었다. 독서를 해야 머리에 뭔가가 채워지는 것인데, 대학교를 다니다보면 정작 전공서적이나 수업을 위해 읽어야하는 책들이 아니면 읽을 시간이 도통 나지가 않는 것이었다. 공연계통 수업을 많이 듣다보면 더더욱이나 그러했다. 내가 쓸 글도 바쁘고, 그걸 가지고 가서 애들이랑 토론을 빙자해서 ‘니글이 쓰레기니 내 글이 똥통이니’ 하는 맞장을 떠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한들 그 ‘남이 쓴 글’들을 읽을 새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영국 ‘옥스브릿지’계열의 학교들을 동경해왔는데, 다름이 아닌 수업 방식 때문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이 ‘옥스브릿지’계열의 대학들에는 매주 독서를 하고 에세이를 한편씩 써와야 하는데, 이것이 졸업할 때까지 4년 내내 계속 된다. 매주 1권씩을 반드시 읽어야 하고, 옥스브릿지 계열의 대학들에서는 교수 1명당 학생수가 20명을 넘지 않기 때문에 꼼수를 부리거나 수업시간에 자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 이다. 이렇게 해서 제대로 정상적인 수업을 소화했다는 가정 하에, 옥스브릿지 계열 대학의 졸업생들은 평균 1000권이 넘는 독서량을 지닌 채 졸업하게 된다. 그것도 동서고금의 아주 클래식한 양서들로만 해서 말이다. 오죽이나 내가 학교다니면서 책읽을 시간이 없었으면 이 수업 방식을 처음 들었을 때 부러움에 거의 울 지경이었다.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고, 어떤게 좋은 책들이고, 살면서 죽기전에 꼭 읽어야 하는지 리스트는 천권도 넘게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리스트에서 뽑아서 책을 읽을 시간들이 지지리도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내가 가장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었을 때는 본업이라는 게 없어진 백수일 때였다. 그 시즌은 정확히 두 번 내 인생에 찾아왔었는데, 군대가기 직전의 5개월 동안이 그러했고, 대학을 졸업한 직후의 1년반 정도가 그러했다. 군대가기 직전의 5개월 동안은 정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읽고 싶었던 소설들을 맘껏 읽는 시간들이었다. 그때는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 청년이었으니 오죽이나 했을까마는. 그때가 아니었다면 내가 읽었던 세계명작문학들은 몇권이 없을 것이었다.

사실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 존경하던 지도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도 이 독서와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자기는 은퇴하게 되면, 누군가를 가르칠 일도, 어떤 무언가를 쓸 일도 없어지게 되면, 정말 정말 꿈은 소설 <빨간머리 앤>을 전권을 쌓아놓고 아주 소중하게 읽고 또 읽을 것이라고 했다. <빨간머리 앤>은 생각보다 양이 아주 많은 소설이고 한 캐릭터의 평생에 걸친 성장과 에피소드들을 다루는 꽤 긴 소설이기에 사람들이 캐릭터로만 알고 있고 정작 그 책 전권을 읽은 케이스는 많이 없다고 말이다. 나는 그 교수님의 욕망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는 깨닳을 수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전권을 쌓아놓고 이틀동안 먹고 자며 그것만 정주행하며 본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독서의 기쁨이란 그런 것이었다. 먹고 마시고 오직 그 하나만을 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것.

좌우지간 다시 돌아와서, 그 바라마지 않던 독서가 가능한 백수생활의 두 번째 시즌은 그리하여 졸업 후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찾아왔다. 이번에는 독서의 방향성이 조금은 달랐던게, 정말 클래식하고 약간은 어려운 책들, 재미위주보다는 삶에 도움이 되고 내가 원하는 모르는 세계에 대한 탐험이 될만한 책들을 리스트로 잡았다. 그 중 가장 큰 모험이 됐던 책은 두 권이었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와 버틀란드 러셀의 <서양 철학사>.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이미 읽었을 입문 책이었겠지만, 미술도 철학도 비전공인 나에게는 두 책은 큰 도전이었다. 거기다 두 권 모두 3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

다행인건 내가 백수라는 것이었다. 오로지 독서에만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서양 미술사>를 읽으면서는, 이것을 조금더 빨리 읽었다면 예술을 보면서 더 많은 기쁨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만큼 좋은 책이었다. 좋아하는 그림작가가 생겼고, 좋아하는 작품이 생겼다.

첫머리에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서양 철학사>에 관한 독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학, 과학, 종교, 철학, 심리학’은 원래 하나였고, 그것이 바로 고대의 ‘철학’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또한 종교적인 생각이란 것은 재밌게도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그 ‘피타고라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는데, 피타고라스는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해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피라미드는 워낙 오래전에 지어진 건축물이라 이미 고대 시대에도 고대 취급을 받았다)의 높이를 정확하게 재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미친 파급력은 우리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수학을 이용해 높은 건물의 높이를 잰 것에 그친 게 아니었다. 그가 행한것은 사실상 ‘수학적 사유’ 라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활동’을 통해 ‘피라미드의 높이재기’라는 당시의 ‘인간의 물질적 세계의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불가능’을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능케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현실세계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물질 혹은 물질 생산을 위한 노동만이 값진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유와 고민이 물질 세계의 것보다 더 값지고 신성하고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버틀란드 러셀은 피타고라스 편에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다.

‘피타고라스가 없었다면 종교도 불가능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가치체계는 사실상 그가 처음 주장했으며, 또 처음 증명해낸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는 ‘초등학생도 알기 쉬운 상대성이론’이라는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나는 그가 세운 가설이 어떤 것인지를 그 영상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빛이 초속 30만km 라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세웠던 빛에 대한 가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더 충격적이었다. 뭐랄까, 나는 아인슈타인이 빛에 대해 세웠던 가설은 꽤나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아인슈타인이 세웠던 빛에 대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빛보다 빠른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빛의 속력을 관찰해도, 빛의 속력은 시속 30만km로 동일한 고정값이다.’

사실 상대성 이론을 처음 접하게 됐을 때 가장 난관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아니 빛의 속력은 30만km 인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그게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론상 그것보다 빠른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속력을 계속 높이다 보면 언젠간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 라고 단언하는 것은 뭔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거기다가 첫 번째 가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두 번째 가설은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리 빨리 움직이면서 빛을 관찰해도 빛의 속력이 30만km 로 동일하다니? 내가 움직이는 속력만큼 줄어들어 관찰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인간의 상식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해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인가?

한마디로 고차원적인 물리법칙이란 일반적인 문과생의 상식을 파괴하고 뛰어넘는 것이었다. 내가 쓴 글을 보며 비웃는 이과생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인슈타인의 저 가설 두 개가 처음에는 이해하는게 힘든 걸 넘어서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더더군다나 나중에는 ‘빛은 파장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다’ 라는 이야기는 이제 눈이 핑핑 돌아가는 수준이었다. 거기까진 어찌저찌 받아들인다 해도 ‘빛은 파장으로 관찰하면 파장이고, 입자로 관찰하면 입자다’ 라는 수준의 이야기는 이제 과학을 넘어선 말장난 수준으로까지 들려졌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관문을, 그야말로 그 첫관문을 넘어서자 조금씩 재밌어졌다. 그리고 그걸 인정할수밖에 없는 것은, 그 나름대로 종교적인 빛에 관한 이야기를 믿을수밖에 없는것은 그 이론을 이용해서 우리의 GPS가 돌아가고, 핸드폰이 돌아가고, 우주선과 인공위성들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그래서 빛에 대해 공부하고 알게 되면서, 오히려 기독교적인 신에 대해서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물리법칙은 생각보다 기괴한 면이 있구나. 인간의 상식체계를 뛰어넘는 일도 세상에 일어나긴 하는구나. 철학적인 사고방식이 종교적인 사고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구나. ‘진리’와 ‘하나님’이 나름대로 대입될 수 있는 단어들이었구나. 빛이란 인간의 범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이란 것과 꽤나 닮았구나, 라는 생각.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떠났을때도 어렴풋이 그곳의 가치체계와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아 이런게 신앙일 수 있겠구나’ 라는 마음이,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신앙이란게 인간의 논리적인 머리로도 자연적으로 가능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곳에서 봤던, 구름을 뚫고 한줄기 기둥 같은 것이 땅에 내려 꽂히는 듯한 그 태양빛을 보면서였다. 그 빛에 대한 느낌이, 빛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심이라는 걸 긍정하게 됐으니, 세상은 생각보다 알 수 없는 것들의 연결 투성이였다.

독서는 정말 중요하다. 공부가 정말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공부의 많은 방법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치고 힘들때 나를 위로해줬던 것도 독서이지만, 내가 한계에 부딪쳤을때 나를 한단계 올라설수 있게 해줬던 것도 독서였다.

한국은 이미 교육의 질이 빈부격차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수준이 되었다. 헬조선이니 수저론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도, 이제는 계층간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비웃는 말이니 말이다. 일류 대학을 나와야 상위의 직업들을 가질 수 있는 한국에서, 또 하위의 직업들을 가지게 되면 생각보다 많은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한국에서, 계층간 이동이 불가능하고 이미 사교육과 학군 같은 교육의 질에서 이미 계층이 일찌감치 나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아이들이 책이라도 많이 읽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일텐데, 한국의 공교육 체계는 적극적인 독서따위는 장려하지 않고, 독서교육에 대한 인식도 적으며, 무엇보다 각 동네별로 공공 도서관의 수와 질이 너무나도 떨어진다. 아이들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읽고싶어도 어디에서 읽어야 하는지, 도서관의 수도 질도 떨어지는 이 상황에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31년의 짧은 인생동안 두 번의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백수시즌을 가지고 오로지 양서의 독서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집이 그렇게 떨어지는 집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일 수가 있었다. 나는 평생 아르바이트를 1년 이상 해본적이 없고, 항상 생활비를 받아 쓰는 게 자연스러운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생계와 외로움, 혹은 가정의 불화와 학대 같은 것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독서를 해라’ 따위의 말은 가증스러운 위선일 수밖에 없다. 내가 예술가로서 가지는 가장 큰 콤플렉스도 그것이다. 나는 결국에는 위선자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공개된 플랫폼에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첫째로 하위의 직업을 가지더라도 사람들이 차별받고 학대받고 경제적으로 곤궁하여 비인간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둘째로 하위의 직업을 가지더라도 사람들이 1년에 1권씩은 양서를 읽을 수 있는 환경도 되었으면 한다.

나는 누구나가 빛의 신비로움과 종교적인 면에 대해서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누구나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초등학생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추상화를 보며 눈물지을 감수성과 이해력을 지닐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또 누구나가 쉐익스피어를 읽고 동양고전을 읽고, 인간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인생에 대해 철학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또, 피타고라스가 단순히 피타고라스의 정리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교실에 앉아서 지루해하고 있는 너희들의 가치체계 중 중요한 것을 처음 고안하고 증명해낸 사람이기에 위대하고 기억해야할 이름이란 것을, 그들이 알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독서라고 믿는다. 나는 모든 이들이 양서를 읽고 사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양서를 읽고, 공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마침내 31년의 삶 동안만에 ‘신앙’에 대해 이해하고, 비로소 ‘신앙’이 있는 타인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이 비로소 조금 더 넓어졌던 만큼,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독서’와 ‘공부’라고,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