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목욕탕을 간다는 건

일요일 아침

아빠와 손 잡고 갔던 공중목욕탕이 생각난다.

물장구를 칠 수 있다는 기대감 반, 그러나 때를 밀 때의 고통스러운 시간에 대한 두려움 반. 그 두 가지가 팽팽하게 맞섰다면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겠지만 목욕을 하고 난 다음에 먹는 바나나 우유는 그 균형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곤 했다. 작은 아이였지만, 저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재고 또 재어 아빠 손을 꼭 붙잡은 것이다.

목욕탕에 도착하면 바가지 두 개를 포개어 배 아래 대고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곤 했다. 냉탕에서는 다이빙을 하고,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수건으로 물을 막아 놓고 나만의 작은 욕조를 만들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다른 사람들 봐가며 눈치껏 즐겼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되었을까. 아마도 주위에 너그러운 아저씨들이 자녀와 손주를 생각하며 참았으리란 건 이제 와서 알게 된 작은 깨달음이다.

때를 미는 시간은 곤혹이었다. 초록색 때수건이 어린 내 살에 마찰을 일으킬 때, 난 오만상을 찌푸렸다. 눈을 질끈 감고 이 시간만 지나면 다시금 물장구를 치거나, 바나나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되뇌었다. 그 두 가지라면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아빠와의 목욕탕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가 전부였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와 더 이상 목욕탕을 같이 가주지 못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남탕보다는 여탕의 기억이 더 많고 생생하다. 어머니와 누나, 그렇게 셋이 다니던 목욕탕은 남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탕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했고, 목욕 이후엔 빨대 꽂힌 바나나 우유가 손에 들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두 해가 지나갈 무렵, 목욕탕의 손님들 중에 몇몇은 어머니께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를 목욕탕에 데려갈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리 없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난 일요일 아침에 당연히 가곤 했던 목욕탕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옛날이야기를 좀 하자면, 그때는 일요일엔 거의 무조건 목욕탕을 가야 하는 때였다. 집에서는 지금처럼 샤워할 여건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아궁이에 연탄을 떼는 집이 더 많았고, 당시만 해도 ‘때’를 밀어야 ‘목욕’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주 5일 근무도 아니었기에, 일요일 아침엔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온 가족이 목욕탕을 갔다.

어찌 되었건, 나는 잠시 가족들과 목욕탕을 같이 가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남탕에 혼자 가기 시작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온 내 또래의 아이들은 아빠가 때를 밀어줄 때 역시나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 얼굴도 덩달아 오만상이 찌푸려졌었는데, 살갗의 아픔이 전해져서가 아니라 부러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말할 수 있다. 탕을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에는 목욕탕 안에 있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닫이 냉장고를 열어 바나나 우유를 들고는 빨대를 꽂아 시원하게 마셨다. 시원한 바나나 우유는 모든 균형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혼자 가기 싫었던 목욕탕도 그렇게 가게 만들 정도로.

다시 일요일 아침

내가 아빠가 되어 아이들(두 아들)을 목욕탕에 처음 데려간 건, 첫째가 6살 그리고 둘째가 4살 때였다.

온수가 만연한 시대. 굳이 공중목욕탕(요즘은 거의 찜질방과 함께 하는)을 갈 필요가 없었지만, 어느 일요일 아침의 갑작스러운 결심이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목욕탕의 문을 열고 싶었고, 아이들과 물장구도 치며 때도 밀어 줄 요량이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뒤에는 바나나 우유를 꼭 사줘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혹시라도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져 다치진 않을까, 물 안에서 잘못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제대로 된 추억(?) 하나 만들지 못하고 헐레벌떡 시간을 보내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4년 후. 네덜란드에서의 주재를 마치고 한국으로 온 후 첫 번째 일요일. 일요일 아침의 조용하지만 추운 공기가 나로 하여금 목욕탕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목욕탕 갈래? 아이들은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한 후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양 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집에서 따듯한 물로 목욕하고 샤워해도 되지만, 아이들은 굳이 왜 목욕탕을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아빠가 어디 가자고 하니 웃으며 따라나선 것이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고.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기분이 좋다. 물장구도 재밌고, 냉탕에서의 수영도 좋아한다. 바가지 두 개를 포개어 임시 튜브를 만들어 주니 좋단다. 배에 깔고 물 위를 둥둥 떠 다니며 웃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아이들은 그 시간을 만끽한다. 아이들을 온탕에 남겨두고 나 먼저 나와 목욕을 한다. 때도 밀고 머리도 감고. 그리고는 첫째 녀석을 불렀다. 녀석의 때를 미는데 간지럽다고 난리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둘째 녀석도 마찬가지. 덕분에 어렸을 때의 아팠던 기억은 사라지고 나도 그저 웃는다. 살갗이 아픈 기억이었는지, 아빠와 목욕탕을 더 오래가지 못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었는지. 어찌 되었건 나는 아빠가 되었고, 두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미닫이 냉장고를 찾았는데 없다. 그 자리를 무뚝뚝한 자판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바나나 우유는 거기 없었다. 커피, 이온 음료, 식혜, 콜라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초코 음료. 첫째 녀석은 식혜를 골랐고 둘째 녀석은 초코 음료를 선택했다. 사이사이가 길게 뚫린 평상에 나란히 앉아 음료수를 홀짝 거렸다. 아이들에게 좋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웃는다. 그 웃음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가장으로서의 무게, 더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아이들을 목욕탕에 데려온 건 난데, 위로받는 것은 나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주고자 했는데, 그게 잘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면서.

바나나 우유 하나 바라보고 갔던 내가, 어쩌면 그렇게 우리 아빠를 위로했었을까? 물장구치며 웃고, 때 밀 때 울고. 그리고 또다시 바나나 우유를 먹으며 미소 짓던 나를 우리 아빠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무슨 기분이었을까?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 일찍 떠나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아들과의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한 것에 위로를 해드려야지 생각했다.

두 아들 녀석들 때문에, 내가 깨달음이 많아진다. ‘아빠’라는 이름과 역할이 주어진 그 이후로.

P.S

나는 다행히 그런 일이 없었지만, 어렸을 적 엄마 따라 여탕에 간 몇몇 친구 녀석들은 그곳에서 같은 반 여자 친구를 만나곤 했다. 그 둘 다 탕 속에서 나오질 못한다 던가, 그것이 알려져 더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암묵적인 합의 하에 비밀에 부치는 일도 많았다. 요즘엔 상상도 못 할 그러한 일들이, 돌아보니 정겹다. 다시 돌아가지도, 재현하지도 못할 일들이라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