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부터 게임을 아주 좋아했다. 캐릭터를 만들거나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능력치’ 라는 걸 보고 골라야 했는데, 나는 꽤 극단적인 편이었다. 힘만 무식하게 세거나, 혹은 스피드만 과하게 빠르다거나, 어떨땐 오로지 마법에만 몰빵한 능력치처럼 특정 능력치가 굉장히 뛰어난 걸 선호했다.

요즘도 그럴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흔한 현상이었다. 뭐든지 극단적인 캐릭터는 매력적인 법이니 말이다. 자고로 전사라면 힘이 강해야 하고, 마법사라면 마법을 잘 쓰면 그만인데, 힘은 조금 떨어지는 대신 적당히 마법도 잘 쓰는 전사라거나, 마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적당히 칼도 잘 다루는 마법사라는 건 게임 안에서는 전혀 매력이 없었다. 게임 안에서의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도 더 분업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Party를 구성할 때는 능력치들이 특정 부분에서 대단히 특출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가며 플레이를 하는 게 주된 방식이었는데, 이런 파티 구성에서 적당히라는 건 용납되지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적을 신나게 때려잡는데 있어서 공격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공격만 신경쓰면 됐고, 팀원들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역할들은 마찬가지 그것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공격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한가하게 자기 체력을 채우거나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그만큼의 비효율을 상징했다.

거기다가 혼자서 플레이를 할 때조차 적당히 뛰어난 캐릭터는 매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게 설계되기도 했지만, 보통은 극단적인 능력치여도 미숙한 것들을 보완해주는 아이템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게임을 할 때도 보통은 그러했다. 나는 항상 능력치를 극단으로 몰아넣는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밸런스라는 걸 별로 생각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조건 재미였는데, 극단적인 게 아니면 재미가 없었다. 힘에만 투자하는 캐릭터는 당연히 느리기 마련이었는데, 그 느림에도 불구하고 한 대를 맞추면 상대방을 보내버릴 수 있다든가, 스피드에만 투자하면 당연히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데미지는 낮았지만, 역으로 한 대도 맞지 않고 상대방을 농락할 수가 있었다. 친구들과 게임을 할 때는 그런 기형적으로 극단적인 캐릭터들을 플레이하며 낄낄거리며 웃고는 했다.

한번은 친구와 축구 게임을 하는 중이었는데, 난 스피드가 빠른 선수로 사이드를 공략하는 걸 좋아해서 모조리 그런 선수들로만 구성해서 게임에 임했다. 내 선수 구성이 너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내가 공을 잡으면 친구의 골대 앞까지는 정말 고속도로가 뚫린 것처럼 시원하게 달려갈 수가 있었다. 문제는 골대 앞까지는 잘 가지만 그 앞에서 골대 안으로 슛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상황자체가 굉장히 웃기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난 게임을 좋아했지, 잘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또래 친구들 중에는 정말 게임을 잘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조차도 프로게이머 같은 영역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으니, 나 같은 인간은 그저 좋아서 재밌으려고 게임을 하는 ‘즐겜러’였던 듯하다. 이런 성향은 사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게임을 할 때는 정말 캐릭터가 확실한 걸 좋아하고, 스포츠를 볼 때도 캐릭터가 확실한 선수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호날두나 메시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수비수를 봐야한다는 생각 따위는 안하는 것처럼.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깨닫게 되는건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극단적인 능력치보다는 밸런스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종합격투기나 축구에서 선수를 판단하는 항목은 바로 ‘밸런스’ 인데 이건 몸의 균형감각을 뜻하는 ‘바디밸런스’ 항목도 있지만, 종합적인 능력치들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분포되어있는지를 뜻하는 ‘능력치’의 밸런스항목도 존재한다.

실제로 지금처럼 MMA 즉 ‘종합격투기’의 시대가 오기 전, 태권도나 유도 복싱 선수들이 날것 그대로 맞붙었던 ‘이종격투기’의 시대가 있었다. 이 시절에는 선수들이 정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치 그대로만 가지고 상대방과 맞서 싸웠다. 태권도를 하는 선수는 복싱을 따로 연습할 생각을 안했고, 복싱을 연습한 선수는 레슬링을 연습할 생각을 안했다. 이러다보니 쓸데없는 무술끼리의 VS 논쟁도 자주 붙는 편이었고,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종목들끼리 맞붙을때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허무할정도로 쉽게 종료되어버리는 경기들도 많았다. 태권도 선수가 아무리 발기술이 좋다 한들 손기술을 전혀 보완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고, 그라운드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한들 타격기술이 아예 없으면 상대방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지는 일이 속출했다. 보는 맛이 좋았을 것 같지만 오히려 굉장히 수준 낮은, 정말 싸움에 가까운 경기들이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현재에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어떤 종목을 수련했건간에 MMA에 도전하는 선수는 MMA, 즉 ‘종합격투기’ 선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종합이란 말은 말그대로 종합이다. 레슬링 능력, 태클, 태클방어, 클린치에서의 공방 능력, 킥과 펀치, 거기에 무릎과 팔꿈치까지 골고루 사용 가능한 타격 능력, 그라운드 기술, 이 모든 것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소홀할 수가 없다. 이중에 어느 하나가 소홀하다면 바로 약점으로 분류되고, 그게 공략당하면 선수는 무기력하게 패배하게 된다.

UFC에 진출해있는 ‘최두호’ 선수의 경우 동양인 출신 파이터 중에서는 드물게도 ‘파워펀처’로 분류되는 성향이었고, UFC에 진출해서도 펀치로 화끈한 KO를 만들어내는 등 수많은 팬들의 지지와 기대를 한몸에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컵 스완슨 과의 매치에서는 그동안 전문가들이 약점으로 지적해왔던 것들이 공략당하며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펀치의 파워자체는 최두호가 더 강했다는 평도 있었지만, 역시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서 밸런스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 약점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별거 아닐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최두호 선수는 마치 펜싱 선수처럼 앞뒤로 빠르게 치고 빠지고 다시 들어가는 스텝이 강했지만, 상대방의 옆으로 돌아빠지는 스텝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코칭 스태프들이 최두호의 약점을 보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팬들도 아마 스텝을 보완하거나, 스텝이 따라잡혔을 때의 레슬링을 보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경기 당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최두호는 경기에서 평소 잘 쓰지도 않았고 보기에도 어색하기 그지 없었던 킥을 사용했다. 여전히 옆으로 돌아빠지는 스텝은 없었고, 최두호의 킥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최두호는 결국 스텝을 따라잡힌 뒤 컵 스완슨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패배했다.

축구에서도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그전에는 수비수면 수비만 잘하면 장땡이고, 공격수는 공격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요즘에는 공격수들도 전방 지역에서부터 상대방에게 압박을 걸며 수비 가담을 해줘야 하고, 수비수는 세트피스 상황에서 큰 키를 이용해서 헤딩 공격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 가담에 올라와야 한다. 사이드 백 즉 측면 수비수는 아예 요즘 전술에서는 공격의 핵심으로 꼽히는 자리이다. 오죽하면 사이드 백이 강해야 팀이 강해진단 말이 있을 정도이다. 중앙 미드필더는 수비부터 공격까지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하고 뛰어다니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골키퍼조차도 독일의 노이어 선수를 위시로 해서 발밑 기술과 후방에서부터 수비수들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빌드업을 전개해나가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의 선수로 몇 명을 꼽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유상철이었다. 유상철 선수는 선수 시절에도 골키퍼 빼고는 모두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했는데,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대표팀에 부상선수가 많았고 또 유럽 선수들과의 육체적 경합에서 큰 장점을 갖지 못하는 플레이들이 속출하는 것을 보며, 새삼 유상철 선수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90분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강철같은 체력, 상대방과 경합해서 이겨낼 수 있는 육체적 강인함, 누구와 1대1로 마크를 붙여도 고민되지 않을 수비력, 후방지역에서 공격 지역으로 언제든 좋은 패스를 뿌려줄 수 있는 시야와 전술 이해도, 가끔은 전방까지 올라가서 직접 상대방 골문을 향해 골을 박아줄 수 있는 킬러본능, 거기다 90분 내내 승리를 위해서 집념을 가지고 뛰는 멘탈리티까지. 유상철 선수야 말로 좋은 밸런스의 표본이고, 가장 저평가되어 온 선수가 아닌가 싶다.

게임과 스포츠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느끼는 건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재미는 극단적일 때 빛나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정말 승리와 삶의 질에 기여하는 건 바로 이 ‘밸런스’ 라는 것이다. 워크 & 라이프 & 밸런스를 합쳐서 워라밸이라는 말도 유행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살면서 그렇다고 꼭 뭐든지 잘해야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본적인 소양이라는 게, 꾸준히 새로운 영역과 다른 능력을 개발하고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대에 다니면서 연출에 대한 지적을 들을 때마다 자주 듣던 소리가 ‘무대 위에서의 블로킹’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든가 ‘음악의 타이밍’에 대해서 지적하는 소리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오만하고 지저분한 지적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것들은 타고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후천적인 공부로 개발되는 능력들이다.

제대로 글자도 읽지 못해서 떠듬거리는 배우에게 아무리 좋은 희곡을 가져다준들, 리딩에서는 듣고있기도 괴로웠다. 반면 한번도 무대에 서서 연기해본 적이 없는 작가들은, 자기 입으로도 민망해서 한마디도 내뱉지 못할 대사들을 오만하게도 배우들에게 연기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서양 미술의 역사와 미술에서의 구도잡기 같은걸 한번도 공부해본적 없는 사람에게 블로킹을 제대로 해내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고, 오선지를 그리고 악보를 보거나 피아노를 잠깐이라도 쳐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음악적 디테일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도 기가 차는 일이었다.

이미 스포츠에서도 그러하지만, 예술에서는 더더욱이나 종합적인 능력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이제 예술은 특정 장르라는 게 거의 없어지고 허물어지는 추세이다. 백남준이 시도해서 뭔가 장르로 굳어진 것 같은 비디오 아트는, 이제 전국민이 1인 방송이 가능한 시대에 와서는 모두가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해도 무방해졌다. 현대무용과 현대연극의 경계선은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 어떤 작품은 이게 무용인지 연극인지 특정짓기 불가능해졌으며, 그러면서도 작품의 수준은 굉장히 높아졌다. 절대 섞일 것 같지 않던 영상과 무대조차도 이제는 점차로 섞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갈라파고스처럼 자신의 전공을 고수하는 것은 멋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시대의 변화에 무지’한 멋없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허물어지는 시대에 인공지능 산업을 위시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까지 도래한다고 난리 법석들이다. 공부해야 할 시기이다. 자기가 잘하던 것을 넘어서, 자기가 못하던 것을 공부하고, 밸런스를 맞춰야 할 시기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