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렵다, 어른

늘 아이들과 함께였던 기억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항상 주변에 나보다 어린 동생들을 곁에 두며 살아왔다. 내가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나보다 3살쯤 어린 친척 여자 아이를 우리 집에서 돌봐준 것이 시작이었다. 내가 8살 되던 해에는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도 겨우 양치질이나 제대로 할까 싶은 나이였는데, 나름대로는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꽤 아꼈던 것 같다.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타서 먹이고, 안아서 어르고 달래며 재우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봐야 부모의 그 노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뒤로도 이상하리만치 우리 가족에게는 늘 어린 아이들이 머물렀다. 전세로 주택을 몇 번씩 이사할 때마다 지원이, 우주, 도윤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적어도 3명이 넘는 아이들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아이들이 우리 집 거실에서 걸음마를 떼고, 부엌에서 간식을 먹고, 베란다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 후로도 우리 집엔 아기와 어린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엄마가 7남매 중 맏이인 덕에, 외사촌 동생들이 여태 우리 집을 들락날락하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초등학생 글짓기 과외를 하고 있고, 매주 여자 친구의 쌍둥이 여동생 집으로 가서 생후 28개월, 5개월 아기들과 반나절을 보낸다. 이쯤 되면 내 사주에도 어린 아이들과 관련된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렇게 내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아기들과 아이들, 통칭해서 ‘어린이’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오히려 괜찮은 ‘어른’의 모습을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비속어를 섞어가며 막 내뱉던 말도, 어린이들 앞에선 고르고 고른 점잖은 단어들만 사용하게 되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의 안 좋은 버릇들을 여지없이 따라하는 어린이들 앞에선 옛말처럼 물도 함부로 마실 수가 없는 법이니까. 아직도 어른이 된다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린이 앞에선 뭔가 어른스러워야한다는 생각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어른과 어린이의 사전적 정의

어린이와 어른. 얼핏 닮은 듯한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은 그저 흐르는 세월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가보다. 애늙은이라든가 나이를 거꾸로 먹은 어른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을 하게 된다. 그렇게 뭔가 잘 와 닿지 않을 땐, 우선 사전적 정의부터 찾아보는 것이 속 편하다. 복잡다단한 세상만사를 한 문장, 한 문장으로 정해둔 게 사전이니까. 왠지 사전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삶이 단순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린이의 사전적 정의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 대개 4, 5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아이’이다. 특별할 것도, 헷갈릴 것도 없는 이 명료한 정의 앞에서 적어도 올해 나이 서른의 내가 확실히 어린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의 어원을 살펴봐도 딱히 의문스러운 점은 없다. 과거 ‘어리다’의 의미가 ‘어리석다’에서 ‘나이가 어리다’로 변화하면서 ‘어리다’의 관형형인 ‘어린’과 의존명사 ‘이’가 합쳐진 합성어가 어린이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리지 않은 나는, 결코 어린이는 아니다.

반면에 어른에 대해서는 사전적 정의를 살펴봐도 여전히 의문스럽다. 어른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결혼을 한 사람.’ 하나하나 따져보자. 생물학적인 성장이 멈췄다는 점에서 나는 ‘다 자란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자기 일에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좀 애매하다. 책임지며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때로 무력하고 무책임해질 때도 있었다. 나이나 지위나 항렬은 상대적인 개념이니 너무 가변적이고, 아직 미혼인 걸 보면 또 어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전적 정의를 몇 번 곱씹어 읽어봐도, 나는 내가 어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른의 어원은 다소 원초적이기까지 해서 허무하다. 여러 설들이 있지만,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어원은 과거 ‘성관계를 맺다’는 의미를 지녔던 ‘어르다(어루다)’가 그 뿌리라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고 부부관계를 맺을 때가 오는데 그러면 비로소 어른으로 봐도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첫 성관계 연령이 13세라는 조사가 발표되고, 비혼주의가 공공연한 요즘 시대에는 전혀 와 닿지 않는 어원이다.

참 어렵다, 어른

사실 생활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깨닫는 어른이란 건, 꽤 냉소적이고 건조한 느낌이었다. 꿈, 희망, 정의 따위의 단어에 대해 코웃음 칠 수 있는 사람. 체념을 신체의 일부처럼 받아들일 줄 알고, 무탈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 적어도 제 밥벌이는 스스로 해결할 줄 알고, 그러기 위해서 가끔 교양 없고 교활해지는 것도 어른스러움이라고 퉁칠 줄 아는 사람.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하는 그런 사람, 그런 어른.

그래서일까, 내가 아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나는 철이 없다. 철도 없고, 돈도 얼마 없다. 하고 싶은 일을 놓지 못해서 나이 서른에 택배 일을 하며 글을 쓴다. 남 얘기였을 땐 ‘열정의 아이콘’처럼 멋있어 보였던 생활이 정작 내 것이 되고 보니, 매일 매일이 그저 최선일 뿐이다. 멋있을 것도, 드라마틱할 것도 하나 없는 묵묵한 최선의 일상. 무엇보다도 이런 글을 적고 있다는 것부터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자꾸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서른이고 얼마 가지 않아 서른하나, 서른둘이 될 테니까 잘 모르겠다며 어른이 되는 일을 미루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름의 방식으로 어른을 정의하고,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긴 한숨을 내뱉는다. 내뱉었던 한숨의 부피가 성장의 증거라면, 나는 이미 다 늙은 노인이지 않을까. 내가 내 삶을 나답게 산다는 거, 스스로에게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거, 참 어렵다. 참 어렵다, 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