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힘이 없다. 예술만큼 현실 세계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예술을 하고는 있지만 때때로 예술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조차 한다. 예술이 정치력을 가진다? 그런 나라가 아직 있기는 한가? 그나마 꼽아보자면 북한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체제의 과시를 위해 예술을 육성하는 나라조차 북한을 빼면 전무하다시피 하다.

과거 유아인이 주연했던 영화 <베테랑>이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대기업과 재벌 후계자의 안하무인 갑질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이 영화에 열광했다. 2015년 합계 13,413,991명이 관람한 이 메가 히트작은 “어이가 없네?” 라는 유아인의 대사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같은 대사들이 거의 신드롬처럼 유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확히 이 영화야말로 한국에서 왜 예술은 힘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자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테랑>은 통쾌하게 또 적나라하게 재벌들의 갑질을 풍자하고 드러내놓으면서 사회고발의 냄새마저 짙게 풍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배급사는 한국 영화계의 슈퍼갑이자 공룡인 CJ Entertainment 였다. 심지어 개봉당시 동원된 스크린개수는 무려 1064개. 헐리우드에서는 기본적으로 독과점 금지법 때문에 금기시 되어있는 제작, 배급, 상영의 3개 합작이 한국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배급사가 끼어들어 투자 및 제작을 하고, 동시에 자신들이 소유한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상영되도록 유통 및 배급까지 담당한다. 더더군다나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자존심 싸움은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데, 현재 유통과 배급을 동시에 장악한 대기업 특히 롯데와 CJ의 알력 싸움은 가관이다.

롯데 시네마는 투자 제작 및 배급 유통을 동시에 할 수 있고, CJ 역시 CJ Entertainment를 통해 투자 제작 한 영화를 CGV 로 배급 유통할 수 있는 독과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서로 당 해의 최고 관객수를 찍는 영화를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가 차지하기를 바란다. 이런 알력 싸움은 이미 그 순수성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인 스크린 쿼터제와 맞물려서 기형적인 스크린 장악 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이미 해외의 수준높은, 또는 저예산 예술 영화들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며, 들어온다 해도 예술영화관으로 직행하거나 하루 개봉한 뒤 사라진다. 한국의 수많은 중소 영화들이 작품성과 무관하게 똑같은 수순을 밟는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던 작품을 꼭 보기 위해 기다렸는데 개봉한다는 소문도 없이 그대로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베테랑>의 스크린 독과점은 양반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찍은 <군함도>의 경우는 2017년 무려 2027개의 스크린에 동시 배급된다. 이쯤에서 군함도를 포함해 역대 최다 스크린 수 확보 영화의 랭킹을 10위까지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2553개

군함도 2027개 (CJ 엔터테이먼트)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1991개

쥬라기 월드 : 폴른 킹덤 1972개

스파이더맨 : 홈 커밍 1965개

신과함께 – 죄와 벌 1912개 (롯데 엔터테이먼트)

택시운전사 1906개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1843개

검사외전 1812개

부산행 1788개

 

그 밑으로 한국 영화들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명량 1587개 (CJ 엔터테이먼트)

독전 1532개

암살 1519개

마스터 1501개 (CJ 엔터테이먼트)

곡성 1485개

밀정 1444개

강철비 1426개

(출처 영화 진흥 위원회)

 

등등. 리스트를 살펴보면 이미 블록버스터와 소위 ‘돈 되는’ 영화들 그리고 스크린 독과점으로 탄생한 영화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함도>가 스크린 2000개를 넘겨서 동원하고도 600만 관객에 그친 걸 보고 나면, 스크린수 917개로 1300만을 달성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는 그야말로 다양성 독립영화의 쾌거로 보이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 리스트에서 그나마도 가장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곡성> 이나 <밀정>의 경우 각각 헐리웃 회사인 워너 브라더스와 20세기 폭스사가 제작과 배급을 맡았다.

이쯤되면 스크린쿼터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그리고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하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스크린 배급 개수가 2배가 차이가 나는 한국영화와 헐리웃 영화의 싸움에서 우리는 누구를 응원해야 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류승완 감독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라는 대사를 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류승완 감독처럼 스크린을 몰빵받았던 감독도 없는데 “우리가 돈은 많지. 그것도 아주 많이.” 정도가 어울리는 대사 아닐까.

헐리웃 영화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시행한다는 그 스크린 쿼터조차 이제는 무색해 보인다. 돈되는 헐리웃 영화는 포기할 수가 없으니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다가 2500개를 몰아주고, 또 괜찮아 보여서 관객 끌 거 같은 국산 블록버스터에 <독전> 에는 1500개를 스크린을 몰아주고 나면, 아니 한국 영화에 배정된 그 쿼터는 정말 필요한 다양성 영화나 장르 영화들, 작품성이 좋아 발굴되길 기다리는 진주같은 영화들은 쿼터의 수혜를 받을 수 있긴 한건가?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와 <독전>은 2018년 같은해에 개봉했다. 이제 상반기가 지나고 하반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오히려 쿼터와 상관없는 한국 영화들의 ‘누가누가 천만찍고 최다 관객을 찍느냐’ 싸움이 박터지게 시작될 시점이고, 쿼터 때문에 오히려 입지가 밀릴 수도 있는 해외 영화들은 한국의 스크린에서 더 보기가 어렵게 됐다. 실제로 깐느,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등 해외 영화제에서 최고의 상을 받고 작품을 인정받은 작품들은 이런 실정에 치여서 제대로 한국에 개봉도 하지 못하고 스러져간다.

실제로 <베테랑>이 흥행하고 <군함도>가 스크린을 쓸어담았을 때, 같은 지적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베테랑>의 경우는 ‘재벌이 재벌 까는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게 돈이 되기 때문’ 이라는 분석과 동시에 ‘영화에서 아무리 재벌 까봤자 현실의 재벌에겐 1도 손해가 없기 때문’ 이라는 냉소적인 분석이 동시에 나왔다. 이때도 분석의 요지는 같았다. “예술은 힘이 없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배권은 자본으로 넘어갔다.” 류승완 감독은 자본과 싸우는 이야기를 만들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자본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인 아이러니를 가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관리한 문건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중대한 헌법 위반 사유였다. 연극계에서 특히나 이슈가 되고 가장 먼저 터뜨리고 쟁점화 시킨 부분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정권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연극이나 예술작품을 국가 및 기업 공모전에서 탈락시키고 예의주시했던 부분이었는데, 나는 아이러니하지만 그 덕분에 이때 당시가 드물게 가장 예술이 힘이 강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이때는 정권에 비판적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투쟁이 되는 시절이었다. 만일 이때당시에 정권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예술계를 내버려뒀다면, 오히려 예술계는 정치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작품으로 할말 다 해도 보러 오는 관객수는 처참하게 정해져 있고 적자가 확정인 마당인데, 이슈가 된다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평생 이름도 몰랐을 연극인들을 그 블랙리스트 덕분에 티비 뉴스에서 접했을 것이다. 심지어 <베테랑>처럼 재벌을 비판하는 영화가 흥행을 하더라도 그 영화를 만든 재벌 기업은 오히려 돈을 버는 구조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나같은 경우도 당시 학교에 다니던 시절 희곡에 썼던 대사 중 “박근혜 내가 뽑았냐?” 라는 대사가 있었다. 졸업 작품 공연에 뽑히게 됐는데 지도 교수님과 공연 팀 학생들이 리딩을 하자마자 한 첫마디가 ‘저 대사는 빼야겠는데요.’ 였다. 나도 동의했던 부분이고 결국 수정이 되어 졸업 공연이 올라갔었다. 당시에는 만일 정권이 바뀐다면 이 대사를 그대로 살려서 공연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웬일, 막상 정권이 바뀌고 나니 그 대사는 너무 낡은 대사가 되었다. 이미 현실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과거에 안주할만한 예술가도 없을뿐더러, 관객들조차 현실의 문제에 앞서서 이미 해결된 과거의 문제를 붙잡고 있을 바보는 없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내가 희곡에다가 ‘박근혜’ 라는 대사를 천번을 쓰건 만번을 쓰건 이미 의미도 없고 아무런 힘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대사가 가장 힘이 있었을 때는 그때 그시절이었고, 그 힘의 원천은 그 대사를 ‘지워야 한다’는 현실 덕분이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올해 쓴 희곡은 북한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북한과 한국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희곡이었다. 그런데 웬일, 다 쓰고 나니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조차 급변해버렸다. 이미 내가 쓴 희곡은 낡고 의미없는 문제의식이 되어있었다. 힘을 상실해버린 내 희곡을 보며, 오랜만에 허탈감을 느꼈다. 아니, 솔직한 얘기로는 이런 현실과 상관없이 내 희곡은 큰 힘은 없었다. 내가 쓴 희곡 때문에 현실이 변한 것도 아니고, 현실이 변하지 않았던들 내 희곡이 던졌을 파문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힘이 없다.

특히 현실에서의 정치력은 전무하다.

그러나 예술은 다른 식으로 기능한다. 예술은 미래를 그리고, 제시한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헤집어 놓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어쩌면 영영 풀리지 않을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끊임없이 던진다. 예술은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한다.

내가 처음 예술을 ‘본격적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을때의 목표는 현실에서의 힘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연극을 본 관객이 인생이 바뀌었으면 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랬다. 혹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랬다. 혹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기를. 그게 내가 힘없는 예술을 하는 방식이었고, 바램이었다.

현실과 예술에 대한 관계도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플라톤은 ‘시인들은 위험한 존재들’ 이라며 아테네에서 몽땅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비슷한 스탠스를 취했다. 정치인들은 항상 예술을 두려워했다.

반면 자본가들은 예술에 투자를 하고,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때로는 자신들을 포함한 상류층을 조롱하는 예술에까지 후원했다. 메디치 가문이 그랬고, CJ와 롯데가 그러하다. 자본가들은 예술을 이용했고, 때로는 자본의 힘으로 그것을 컨트롤했다.

한쪽에서는 두려움에 떨어 없애려 하고, 한쪽에서는 녹을 주는 사람을 비판하고 조롱해야 하는 인생. 예술가의 삶이란 재밌는 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이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연명해 살아갔다.

그리고 극히 일부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정치인도 자본가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 모두의 마음과 역사에 이름과 그 영혼을 남기는 것. 그 자그마한 여지가 있으니,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가면서도 ‘재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