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선명해지는 것들

‘라면 부스러기 맛’ 기억

어릴 적의 기억들을 ‘맛’으로 이름 붙인다면, 아마 비슷한 연령대에게는 비슷한 이름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달고나’ 맛 기억, ‘솜사탕’ 맛 기억, ‘감기 시럽약’ 맛 기억 등등의 방식으로. 내게는 ‘부스러기’ 맛 기억이 있다. 생라면 부스러기, 시리얼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 같은.

그 시절의 어른들은 끓여 먹는 라면이나, 다른 과자들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다가도 유독 생라면을 부셔 먹는 것만큼은 몸에 좋지 않다며 타박을 하곤 하셨다. 배에 벌레가 생긴다느니, 머리가 나빠진다느니 하는 이상한 말을 하시면서. 그렇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청개구리 사내아이들의 심보 아니겠는가. 게다가 끓여 먹는 것과는 또 다른 생라면 만의 매력이 있기도 했고.

라면 봉지를 살짝 뜯어 숨구멍을 만들어 놓고, 주먹이나 팔꿈치로 팡팡 쳐서 각자 기호에 맞게 생라면을 부순다. 그런 뒤에 진한 주황색이거나 빨간색인 스프를 탈탈 털어 넣고, 입구를 손으로 모아 쥔 뒤 흔들어준다. 다 흔들고 나면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의 손이 너나할 것 없이 밀려들어온다. 검지와 엄지에 라면 스프가 가득 묻고, 묻은 스프를 쪽쪽 빨아 먹고, 그렇게 빨개진 손가락들이 다시 전혀 익지 않은 면발을 집는다. 아그작, 아그작. 어금니에 면발이 끼고, 입술 주변은 벌겋게 물들고, 지나치게 짠 맛 때문에 혀 아래에선 자꾸 침이 나온다. 그렇게 손가락들이 몇 번 드나들고 나면, 웬만한 생라면 덩어리들은 바닥이 나고 드디어 대망의 ‘생라면 부스러기’를 먹을 타이밍이다. 당연히, 이 ‘생라면 부스러기’는 라면 주인의 몫이다.

말이 부스러기지, 실상 약간의 부스러기와 꽤 많은 스프가 라면 봉지 아래의 한쪽 모서리에 모여 있는 셈이다. 그 짜디짠 부스러기들을 한입에 털어 넣으면 생라면 부셔 먹기가 끝이 난다. 혀가 아릴 만큼 짜고 매운 그 맛. 추억 보정의 힘이 빌리더라도, 그 ‘부스러기’ 맛이 그리 훌륭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 마지막을 훌훌 털어 먹는 보람은 있었다. (글을 적고 있는데, 상상만 해도 입안이 짜서 침이 고인다.)

시리얼 부스러기는 늘 마지막에

어릴 적뿐만 아니라, 다 크고 나서도 ‘부스러기’ 맛 기억은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첫 학기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두 번째 학기는 학교 앞 고시원에서 지냈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요리를 잘도 해먹는 베테랑 자취생이지만, 당시엔 라면 말고 할 줄 아는 요리도 없었고, 생활비도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우유에 말아 먹는 시리얼. 콘푸로스트, 첵스, 코코볼, 아몬드후레이크 등등 종류별로 사다 먹었다.

매번 시리얼 한 봉지를 먹을 때마다, 가장 맛있는 순간은 마지막으로 봉지를 탈탈 털어 우유에 말아 먹는 때였다. 똑같은 시리얼이지만, 그 마지막엔 봉지 제일 아래쪽에 고이 쌓여있던 부스러기들까지 한꺼번에 말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사 진국의 시리얼을 먹는 기분이랄까. 특히 초코 맛이 나는 시리얼들은, 그 부스러기 덕분에 마치 초코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먹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리얼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부스러기들은 늘 마지막에 쏟아졌다.’

브라질 땅콩 효과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우연히, ‘브라질 땅콩 효과’라는 걸 알게 됐다. 여러 땅콩들을 한데 섞어 흔들면,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브라질 땅콩은 위로 올라오고 크기가 작은 알갱이들은 아래로 내려가며 분리되는 현상을 빗댄 표현이었다. 어릴 적 흔들었던 생라면 봉지, 스무살 때 먹었던 시리얼 봉지, 그 가장 아래에 그런 자잘한 부스러기들이 모여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브라질 땅콩 효과’는 알갱이가 큰 브라질 땅콩이 더 좋은 것이라거나,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간 부스러기들이 더 안 좋은 것이라고 정한 가치 판단을 포함하는 단어는 아니다. ‘부스러기’라는 단어의 어감에서 상대적으로 사소하고 자질구레하고 쓸모없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게 ‘부스러기’는 오히려 ‘큰 덩어리’들보다 더 각별한 맛으로 기억된다.

사전적 정의로 ‘브라질 땅콩 효과’는 ‘알갱이 계’에서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다소 거칠게 빗대자면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한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게 뒤죽박죽이었던 날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정신없이 흔들리며 살다 보니 내 인생의 브라질 땅콩과 부스러기들이 구분되곤 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내버려둬도 곁에 남아있는 것과, 붙잡으려 애써도 끝내 떠나간 것들. 뜨겁게 사랑한 적 없이도 오래도록 그리운 사람과, 한때 생의 전부였다가도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 그런 것들은 당장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그때가 되어서야 “아…”하고 깨닫게 되는 거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 제목도 있다. 솔직히 ‘어른이 된다는 것’이 뭔지, 나이 들수록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어른’이라는 게 되기 위해 일부러 천 번씩이나 흔들릴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다 보면 뭔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새삼스럽게 돌이켜 보니, 나는 여태껏 흔들리며 살아오는 동안 ‘부스러기’의 맛을 더 살뜰히 챙겨온 기분이 든다. 별것 아닌 것들, 자질구레한 것들, 마지막에 남은 것들. 내가 좋아하는 시집 제목처럼 ‘그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착’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요즘은 크고 탐스러운 ‘브라질 땅콩’도 좀 먹어보고 싶다. 그럴 듯한 직책, 명예, 두둑한 수입, 뭐 그런 것들. 글을 쓰며 야금야금 먹고 있던 과자는 벌써 바닥이 났는데, 습관처럼 부스러기들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집어먹고 있다.

기질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아님, 아직 조금 더 흔들려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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