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슬까슬, 봄의 코인 세탁소

봄비, 봄의 세수

봄비라기엔 꽤 거센 비가 내렸다. 우산을 깜빡한 사람인 척, 기분 좋게 맞을 수 있는 봄비는 아니었다. 4월인데도 자릴 뜨지 않는 겨울의 묵은 때들을 다 씻겨내려는 것처럼, 밖은 우중충하고 쌀쌀했다. 그런 날엔 이른 저녁부터 불을 끄고, 전기장판을 고온으로 올려둔 침대에 누워서 노랠 듣는다. 김윤아, 이문세, 문문, 김동률 등등. 습기에 청승맞은 슬픔이 눅진하게 섞이면, 공기에선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추진 봄비가 다 그치고 나서야, 진짜 봄의 말간 얼굴이 드러난다. 봄이 봄비로 목욕재계하고 나면 이제 내가 사는 공간이 깨끗이 봄맞이 청소를 할 차례다. 겨우 6평쯤 되는 원룸을 구석구석 쓸고 닦는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 청소를 한다. 화장실 바닥과 벽 타일 사이에 낀 물때도 긁어낸다. 활짝 열어둔 창으로 방 안의 세제 냄새가 빠져나가고, 꽃가루와 미세먼지가 섞인 봄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그 모든 청소의 마지막엔 지난 밤, 내 땀과 호흡으로 눅눅한 이불이 남아있다.

코인 세탁소 사용법

세탁조 클리너와 과탄산소다로 세탁조 청소를 돌려놓고, 커다란 비닐 봉투에 이불과 스프레드, 침대 시트를 바리바리 싸들고 방을 나선다. 5분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원룸촌 골목 귀퉁이에 있는 코인 세탁소. 무인으로 운영되는 코인 세탁소에서는 늘 뽀송뽀송한 냄새가 난다. 건조를 끝낸 미열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곳. 햇볕 좋은 날엔 유리로 된 한쪽 벽면이 가득 환하고, 의자에 앉아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보면 괜히 세상이 평화롭고 느긋해지는 곳. 커다란 세탁기와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신기하게도 새소리며 자동차 소리, 어느 집 주방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같은 생활의 백색 소음이 들려오는 곳.

우선, 교환기에 가져간 만원 지폐를 넣어 500원 동전 20개로 바꾼다. 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뽑는다. 봉투째 찢은 세제와 빨랫감을 세탁기에 그득그득 밀어 넣고 3,500원을 천천히 투입한다. 그리고 기분 좋은 ‘시작’ 버튼 꾹-. 그리고는 바로 맞은 편 편의점으로 가서 단지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사 돌아온다. 별다른 약속도, 해야 할 급한 일도 없는 날엔 코인 세탁소 의자에 앉아 그렇게 단지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덜그덕, 덜그덕 드럼 통 안에서 빨랫감이 어지럽게 회전하는 소릴 들으면서. 한쪽 구석에 달린 TV로 예능 재방송을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하릴없이 남들 SNS를 염탐하면서.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그 평화가 깨지지는 않는다. 코인 세탁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서.

세탁이 끝나면, 조악하게 만든 철제 카트에 빨랫감을 옮겨 담아서 다시 건조기에 집어넣는다. 아까 뽑은 섬유유연제와 빨랫감을 건조기에 그득그득 밀어 넣고 4,500원을 천천히 투입한다. 그리고 다시, 기분 좋은 ‘시작’ 버튼 꾹-. 개인적으로는 세탁기보다 건조기가 돌아갈 때의 소리가 더 좋다. 습기가 날아가면서, 소리가 점점 가벼워진다. 빨랫감 사이사이의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서 공명하는 까슬까슬한 느낌이 있다.

그렇게 건조기를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면 다시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두 번째 편의점에서 마실 거리를 사올 타이밍인 거다. 가끔 과자나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 먹기도 한다. 그래도 제일 만만하고, 제일 손이 자주 가는 건 단지 바나나 우유다. 코인 세탁소에서 마시는 단지 바나나 우유는, 어쩌면 어릴 적 목욕탕에서 먹던 그것의 후속편인지도 모른다.

봄맞이 대청소의 끝은

묵은 때를 벗겨내고, 씻겨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목욕탕과 코인 세탁소는 닮았다. 뜨거운 물에서 잔뜩 몸을 불린 뒤 때를 밀고, 다시 뽀송뽀송하게 말려야 끝나는 목욕처럼 코인 세탁소에 끌려온 여러 빨랫감들도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며 나름의 과정을 겪는다. 가끔은 가기 싫어도 아빠 손에 이끌려갔던 목욕탕. 저 이불도 그냥, 더러우면 더러워진 대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이든 이불이든, 그 무엇이든 제 묵은 때를 벗겨내고 까슬까슬해지는 날들이 필요한 법이다.

건조까지 다 끝낸 이불은, 들고 왔을 때보다 부피는 조금 더 커졌는데도 무게는 한결 가벼워진 것만 같다. 비닐 봉투에 다시 이불을 꾹꾹 눌러 담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이불을 편다. 기지개 켜듯 이불이 평평하게 펼쳐질 때는, 코인 세탁소 냄새가 난다. 까슬까슬하고 뽀송뽀송한 냄새. 뭔가를 포근하게 안아주기 위해선, 이불처럼 저 스스로가 먼저 포근해져야 한다. 때마침, 아까 돌려놓고 나간 세탁조 청소도 끝이 났다. 뭔가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선, 세탁기처럼 저 스스로가 먼저 깨끗해야 한다.

나도 오랜만에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야, 나의 봄맞이 청소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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