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목숨 걸지 않는 사랑

10년 차 프로 연애러

지금의 연인을 스물에 만나 어느덧 둘 다 서른이 되었다. 연차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제 결혼이 어울릴 만한 나이인데 돈이 없어 미루고만 있다. 많은 인생 선배들은 ‘아무리 없어도 살면, 다 살아지더라.’라는 말을 했다. 그래, 막상 닥치면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어떻게든 살아지기야 할 테지만, 아직 우리는 ‘살다 보니 살아지는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물론 세월이 더 지나 돌아보면 이런 생각도, 겁 많은 인생 레벨 하수의 변명이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애를 10년이나 했다는 것, 특히 스물에 만나 서른이 되는 동안의 기간이라는 것, 이십 대 전체를 한 사람과 함께 했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은 아닌가 보다. 심지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진 웬만한 신혼부부가 함께 한 세월보다도 더 긴 세월일 수도 있으니까. 해서, 가끔 아는 후배나 친한 친구들이 무슨 ‘연애의 비법’ 같은 걸 묻기도 하고, 고민 상담을 해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말 딱히 해줄 말이 없다. 우리는 계획을 세워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어떤 비법으로 실타래처럼 엉킨 마음을 단박에 풀어낸 적도 없으니까. 그저 사랑하며 연애하다보니, 10년이 지났다. 이렇게 말하니까, ‘살다 보니, 살아지는’ 결혼에도 조금은 자신이 생긴다.

가끔은 내게 유치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야, 너는 아름이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냐?” 내 대답은 간단하다. “어, 당연하지.” 너무 간단해서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친구들도 있다. 어쩌겠는가, 지난 10년 동안 몇 백, 몇 천 번은 더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대답이니 구태여 고민하는 척,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날 의심하거나, 재수 없어한다. 그것도 뭐,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 대답을 하고 나서 내가 늘 덧붙이는 얘기가 있다.

“근데, 긴박한 상황에서 목숨 걸겠다고 말하는 거, 사실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야.”

목숨보다 버리기 어려운 것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한 의인,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의인, 그런 분들의 희생정신을 폄훼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그 분들은 진짜로 목숨을 걸고 행동했다. 다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크다. 영웅 심리에 빠진 사람은 많지만, 진짜 영웅은 극소수인 것처럼.

내가 덧붙였던 말의 의미는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거다. 내가 이렇게 단정 짓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우리는 목숨도 다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나, 패륜을 저지르는 자식들의 끔찍한 기사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다툰 후에 ’절대 내가 먼저 연락할 수는 없는‘ 연인들의 자존심 싸움은 너무 흔한 레퍼토리다. 심지어 ’연애 고수‘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그런 류의 자존심 싸움에 ’전략‘ 이라는 구실로 같잖은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갑이 되어야 한다느니, 밀당에도 타이밍이 있다느니,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늦어야 한다느니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조언들.

그런 것들을 보고 듣노라면, 궁금해지는 거다. 아니,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다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왜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목숨을 거는 걸까. 그렇다고 그들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애초에 그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각오와 다짐과 만용의 문제니까. “난 자존심 상해서 죽어도 먼저 연락은 못하지만, 걔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는 있어.”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면, 뭐, 그런 거겠지. 목숨보다 버리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 거겠지, 뭐.

감각의 사랑을 하자.

꼰대처럼 보일까봐, 절대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누가 내게 물어보면 조심스레 하는 말이다. “감각의 사랑을 하자.”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목숨 건 사랑 말고, 매순간의 사소한 일상에서 내내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 우리네 삶에서 서로를 위해 목숨 내던져야 할 긴박한 상황은, 사실 한 번 겪기도 어렵다. 하지만 서로 함께하는 일상은, 말 그대로 매순간을 함께 겪는 일이다. 지금, 당장,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진짜 목숨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목숨은 그때 가서 걸자.

뭔가 대단한 걸 베풀고 나면, 사소한 것쯤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오만불손함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길든 짧든, 연애를 진득하게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실 사소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이치를. 말 한마디, 연락 한 번, 표정 하나가 하루의 온도를 바꾸고, 사람을 살린다. 사소한 것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 ‘나는 너를 위해 무려 목숨까지 걸 수 있어. 너에 대한 내 사랑이 이렇게나 대단해. 그런데 너는 왜 내 맘을 몰라주니.’ 같은 말을 하는 게 바로, 상대에 대한 오만불손함이다.

연애는 커다란 한 덩이로 퉁 치는 거래가 아니다. 아주 잘게 조각 난 퍼즐을 함께 맞춰가는 과정이다. 모든 조각들이 반드시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지만, 이딴 조각쯤이야, 해서도 안 된다. 글의 제목인 ‘함부로 목숨 걸지 않는 사랑’의 속내는 이렇다. 연애의 날들에는, 목숨보다 먼저 내어주어야 할 것들이 많다. 사랑은 목숨이 아니라 마음을 떼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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