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 그려 놓은 큰 그림 속에 있다

한 아이가 도화지에 그저 검은색을 마냥 칠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각자 예쁜 꽃과 좋아하는 동물을 그리는 동안, 그 아이는 도화지를 검게 칠하는데 매진한다. 한 두장이면 괜찮을 텐데 검은색의 도화지는 어느새 주변에 쌓이고 쌓인다. 집에서도 칠하기를 멈추지 않는 아이를 보며 선생님과 부모 모두 걱정한다. 그 모습을 보는 나마저 걱정이 될 정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집요하게 열중한 눈빛과 익숙한 듯 적극적은 팔의 움직임으로 더 많은 검은색 종이를 양산해낸다.

갑자기 한 관찰 전문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 아이가 그려 쌓아 놓은 검은색 도화지들을 큰 체육관으로 옮기자고 제안한다. 하나하나 그림들이 모이고, 맞추어져 가면서 어떤 모양새가 이루어진다.

그 넓은 체육관 바닥을 뒤덮은 건 다름 아닌 커다란 고래였다.


일본의 어느 캠페인 광고에서 본 그 스토리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아이의 창의성을 몰라봐준 어른들의 시선에 대한 질타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자는 계몽이 담긴 영상이었지만, 더불어 난 그 아이가 그린 ‘큰 그림’에 주목했다. 도화지에 반복적으로 검은색을 칠하는 행동은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했지만 그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미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그림을 향해 달려가려는 아이의 열망과 노력. 그것이 미치도록 아름다웠고, 부러웠다.

누군가 그려 놓은 큰 그림

세상을 줄기차게 바꿔온 선구자들을 보면, 그들은 ‘큰 그림’의 귀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그 그림 속에 속해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큰 그림’의 소재와 재료가 된다. 누군가는 차별화된 휴대폰을 세상에 내보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구매한다. 하지만, 그것은 휴대폰 구매에서 멈추지 않고 지정된 음악을 사게 된다. 여기에 전용 앱스토어에 가서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앱을 구매한다. 게다가 다른 휴대폰과 다른 운영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다음번에도 같은 휴대폰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집에 남아 있는 방이나 차량을 공유하니 돈을 번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들의 이전엔, 이미 있는 것을 그저 연결하면 세상이 더 편리해지고 경제의 규모도 만들 수 있다는 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있다. 멀리 가는 전기차를 내어 놓은 회사는 자동차 판매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땅속으로는 루프 열차를 하늘로는 우주제국을 건설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무료 이메일과, 수십 기가의 드라이브 그리고 지도 및 위치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그 그림의 크기를 점점 더 넓히고 있다.

큰 그림을 그리는 대표적인 사람 중에는 탐정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리지 못하는 영역까지 이미 그림을 그려놓고 범인이 갈 곳, 행동할 것들을 예상한다. 그가 그린 그림대로 이야기는 흘러 가지만, 보통 사람들은 당최 단면 단면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앞서 언급한, 검은색 도화지가 큰 고래의 검은색 피부 일부였음을 모르듯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림’은 위에 언급한 유명한 사람들만이 그리는 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세상 모든 사람도 저마다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남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어린아이들도 저마다의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는 성장하고 어른이 돼가면서 그 그림의 크기를 축소하는 모양새다. 받아온 교육이 그렇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꺾인 날개. 그리고 실패로부터 오는 두려움으로 우리는 ‘그림’ 그리기에 소극적이거나 아예 그것을 잊기도 한다.

어쩌면 ‘그림’은 삶의 목적이나 목표로 대체될 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왜 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목적’과 ‘목표’는 구분돼야 함이 마땅하다. ‘왜’와 ‘무엇을/ 어떻게’로. 목적은 ‘방향’이다. 그리고 ‘목표’는 그 방향으로 갈 때 필요한 target이자 지표다. 삶의 목적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표를 정하는 것이 곧 ‘그림’그리기인 것이다.

뭔가 거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저 우리는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고 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그림을 그리며 사는가?

우리는 누군가 그린 그림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도 있다. 그것이 크건 작건, 잘 그렸던 못 그렸던 그것 또한 누군가에 영향을 끼친다. 하찮게 보이는 내 그림을 보며 감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못 느끼거나 심지어는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감상평이 아니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그린 그림대로 성실히 그리고 잘 살아왔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그저 다른 사람이 그린 크고 작은 그림 속에서 이름 모를 피사체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그리는 것’에 집착해서 의미 없는 것을 그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충분히 주위를 관찰하고, 무엇을 왜 그릴 것인지. 그리고 구도는 어떻게 잡고 어떤 색을 써서 원하고자 하는 것을 잘 표현할지에 대한 준비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경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붓’과 ‘물감’이 될 것이다. 내가 살아오며 경험한 것들은 내 인생의 밑바탕이 되고, 동시에 무언가를 그릴 때 필요한 도구가 된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한 번 돌아보자. 그린적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은 분명 있다. 그것이 작을 수도, 희미할 수도 있을지언정. 그것을 보면, 앞으로 무엇을 그려갈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천재적이고 거대한 그림을 그릴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몫이다.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 안에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내가 무엇을 그려야 할지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당장 무언가를 그리지 못한다면 그렇게 ‘감상’을 하며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삶을 좀 더 깊고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봤던 그림도, 자주 보다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액자가 보이고, 캔버스가 보이고, 구도가 보인다.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작가의 의도도 나타나고, 나라면 어떻게 그려볼까 상상을 하기도 한다.

다시,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그린 그림 속에 살고 있지만, 나 또한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내 삶의 역작은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나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