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일’과 ‘사랑하는 일’

봄에는 모두 환하다.

갑작스럽고도 완연한 봄이다. 섣부른 여름이 조금 섞인 것 같기도 한 그런 봄.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든 간에 아무튼 이제 4월이고, 벚꽃은 며칠 새 만발했고, 다운 점퍼나 코트 같은 건 옷장 구석으로 퇴장했다.

봄꽃은 꽃잎에 봄볕을 머금는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밖으로 나서고 싶은 계절이다. 사람들은 주말마다 봄나들이를 나서고, 겨우내 동면하던 동물들도, 앙상했던 나뭇가지의 새싹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냈던 시집 <다시, 다 詩>의 ‘봄’편 첫 장처럼 거리마다, 공원마다 아이들이 기립박수처럼 환하게 쏟아지는 계절, 봄. 요즘은 유독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이나 반려견들이 더 환하고 생기 넘치는 것 같다.

강아지를 좋아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아직 개발도 안 된 김해시 삼계동 산자락 아래에서 개구리, 올챙이, 강아지들과 친구처럼 지냈던 나는 지금도 동물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강아지를 좋아해서, 가끔 광안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반려견마다 눈을 떼지 못한다.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지만 반려견에게도 견주에게도 예의가 아니란 걸 알아서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내 눈을 봐, 나한테 달려와서 와락 안겨 봐!’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내곤 하지만 한 번도 이뤄진 적은 없었다. 

어이, 거기 강아지. 내게 안기지 않겠나..?

그럼 반려견을 키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나는 지금 원룸에 살고 있고, 내 여자 친구는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나는 지금 살아 숨 쉬는 한 존재를 책임질 만한 시간도, 돈도 없다. 반려견은 나 보기 좋자고 들여놓는 장식품 같은 게 아니니까. 중간에 싫증 난다고 버리거나 갈아 치우는 게임 속 캐릭터 같은 건 더더욱 아니니까. 

육아, 기꺼이 生을 떼어주는 일

평균 수명이 15년 정도인 반려견을 분양(또는 입양)하는 일에도 이렇게 큰 책임과 다짐이 따르는데, 직접 낳아 기르며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아기의 육아가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입 아프게 주창할 필요도 없겠지. 요즘의 나는, 이미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 친구의 쌍둥이 여동생 D를 통해 육아의 ‘극히 일부분’을 매주 경험하고 있다.

D에게는 이제 26개월에 접어든 첫째 딸 봄이와 생후 2개월 둘째 아들 토리가 있다. (계절이 봄이라 그런가, ‘봄이’는 더 예쁘다!) 물리치료사인 D는 육아 휴직 중이라 집에서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시간이 모자라다. 아기들은 저마다의 패턴으로 먹고, 자고, 싸고, 보챈다. 그 패턴들을 각각 챙기다 보면 정작 엄마인 D는 본인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먹고, 자고, 싸는 일을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 이런 거창하지도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을 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아주 거창하고 힘든 일을 해내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숙명 같은 걸까. 

첫째 봄이와 둘째 토리!

다행스럽게도 D의 시부모님, 남편 모두 육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나와 여자 친구도 거의 매주 주말마다 가서 ‘약간의 도움(?)’을 빙자한 조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육아는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육아 휴직’은 말 그대로 육아를 위해 직장을 쉰다는 뜻이지, 그냥 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차라리 직장은 출퇴근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지. 육아란 정말 ‘제 生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주는 일’이다. 


바라볼 때에만 아름다운 것들

힘들게 육아를 해내는 D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매주 주말마다 나는 봄이와 토리를 보며 마냥 행복감에 빠진다. 내 별명인 ‘바트’를 똑바로 발음하며 내게 안기고 웃어주는 첫째 봄이나, 심지어 입냄새조차도 달콤한 둘째 토리를 보는 일은 정말 행복 그 자체다. 그래서 D의 집에 가면 나는 아기들에게 거의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뒹굴며 논다. 그런 나를 보며 종종 D는 이런 말을 한다. “정말 완벽하게 잘 놀아주는데, 너처럼 그렇게 매일 놀아주면 아마 며칠 가지도 못하고 몸살 나버릴 걸.”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손은, 아기가 꽉 말아쥐는 손.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길어봐야 반나절 정도만 봄이와 토리에게 집중하면 그만인 사람이니까. 내가 하는 건 ‘생활의 육아’가 아니라 ‘잠깐의 놀이’니까.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귀한 자식이라도, 부모에게는 가끔 그 자식이 너무 밉거나 버거워지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을 거다. 내가 봄이와 토리를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름답게만 볼 수 있는 이유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바라볼 때에만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 삶에는 참 많다.

봄이와 토리, 광안리를 거니는 수많은 반려견들, 그 밖에도 그저 바라보면서 아름다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정말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갈 사랑하는 일은 그저 바라보는 일은 결코 아닐 테다. 

사랑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는 서정주의 <자화상> 시구를 변용하자면 ‘사랑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건, 대상의 상처와 상처에 흐르는 피고름까지도 껴안는 일이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도 내 상처와 피고름을 껴안아준 거니까. 

함께 걷는 일이다. 어떤 길이든.

남녀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다르지 않다. 자식이 아주 어릴 때야 부모가 온전히 자식을 감당하지만, 자식도 결국 부모가 지닌 상처와 피고름을 발견하고 껴안아야 할 시기가 온다. 김영랑 시인이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며 내던진 역설법을 마음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모두 누군가를 그런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랑하는 일’은 ‘바라보는 일’과는 확실히 그 깊이가 다르다. 

‘바라보는 일’을 ‘사랑하는 일’로 착각하지 말기

해서, 우리는 ‘바라보는 일’을 ‘사랑하는 일’로 착각하지 않도록 수시로 제 안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반려견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고 해서, 반려견을 사랑하는 일도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고 단정 지어선 안 된다. 당신이 반려견을 사랑한다면 제때에 잘 먹여야 하고, 수시로 산책을 시켜야 하고, 똥오줌을 치워야 하고, 외롭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를 바라보는 일이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고 해서, 아기를 사랑하는 일도 마냥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고 넘겨짚어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육아의 거룩함과 중노동을 폄훼하고 오해해선 안 된다. 

오늘도 읽고, 쓴다.

나이 들수록 바라보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아진다. 여자 친구와 손잡고 걷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지만, 평생 손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프리랜서 작가에게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다. 책임 없는 낭만보다는 책임을 다하는 성실함이 더 좋은 글을 만드니까. 바라보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착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라보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