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의 관심사가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글도 거시적인 것을 주로 쓰게 된다. 이런 경우의 문제는 내가 쓴 글이 이야기라기 보다는 하나의 웅변이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작가로서는 사실 빵점에 가까운 일이다. 웅변은 웅변가가 할 일이지 작가가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중에는 연극 평론가 허순자 선생님이 계시다. 물론 허순자 선생님의 모든 이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게 학교에서 만난 진짜 ‘선생님’ 중 한 분이었고 나의 글쓰기 또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허순자 선생님이 평소 강조하던 바는 기본적으로 이것이었다.

“인물의 입에서 인물의 목소리가 아닌 작가의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그 연극은 형편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나는 이 이야기에 특히나 강하게 공감하는데, 미숙한 작가, 미숙한 연출들은 기어이 끝끝내 이야기에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웅변을 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미숙한 연극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진절머리도 났고 말이다.

오해할까 싶어 말하지만 이야기 안에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 사는 것은 로버트 맥키가 말했듯 ‘밥상머리에서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어느것 하나도 정치가 아닌 것이 없다’. 정치적인 쟁점에 대한 토론거리와 생각거리, 질문을 던지는 수준 높음까지는 바라지도 않을지언정,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 또한 사실 나쁜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게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서 갑자기 웅변이 되었을 때이다.

몇 년 전 명동 예술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리어 왕>의 경우 파격적인 무대 연출과 주연 배우인 장두이의 광기어린 호연으로 화제와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나도 직접 현장에서 그 무대와 연기를 본 사람 중 하나였다. 특히나 그 거대한 무대가 와이어에 의해 들어올려지고, 동시에 무대가 공중에서 좌우로 크게 흔들리며, 스프링클러를 통해서 비가 실내의 극장안에 쏟아지는, 그 광기어린 광야의 무대를 극장 안에 재현한 스펙타클은 정말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실내의 비를(정말 실제로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그렇게 비를 맞을 일은 평생가도 없을것처럼 실내에 비가 쏟아져내렸다) 온몸으로 뚫어가며, 광야를 헤매는 리어를 연기하는 장두이의 에너지는 객석을 지배하고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 장면을 끝으로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되었을 때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나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1막의 마지막이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리어와 함께 광야를 헤매던 광대의 독백으로 끝난다는 데 있었다. 이 광대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친 리어의 옆에서 훨씬 더 미친 짓거리를 해대며 리어를 웃기고 울리고 조롱하는 역할이었다. 1막이 끝나가기 전까지는. 헌데 갑자기 이 광대는 1막의 그 마지막에 한해서 제4의 벽을 깨부쉈다.

광대는 독백을 시작했는데 이 독백을 하는동안 연기의 톤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전까지 리어와 함께 광야를 뚫고 유약한 몸으로 광기에 휩쓸려 나가던 광대는 간 데 없고, 웃통을 깐채로 잘 단련된 배우의 피지컬을 자랑하며 목소리의 톤조차도 유약하던 광대에서 터프한 마초처럼 변했다. 독백의 진행 또한 노골적이었는데 자신들의 이야기가 어느 먼 미래에 극장에서 상연될 것을 예상하는 이 독백의 순간 비가 그쳤고, 그 순간 그 광대는 광대가 아니라 그 광대를 연기하는 배우였고, 그 공간은 광야가 아니라 정확히 극장이었다.

극장이 웅변의 광장이 된 것이었다.

난 그 순간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난 그 연출의, 이야기의 정치적 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연출, 좋은 이야기의 진행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 순간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이야기도 아니었다. 난 돈을 내고 극장에 와서 단 한순간이라도 이런 웅변을 듣게 되는 순간을 경멸했다.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방금전까지 나는 한국의 극장에서 감히 쉽게 볼 수 없는 스펙타클을 목도했고,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던 차였다. 근데 그 스펙타클 뒤에 오는 것이 이런 지리멸렬한 웅변이라니.

정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야기의 진행을 해치지 않고 캐릭터를 깨지 않으면서 제시하고, 무엇보다 질문의 방식으로 던져야 마땅했다.

로버트 맥키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래, 플라톤이 맞았다. 플라톤이 아테네에서 시인들은 위험한 인간들이니 전부 추방하자고 했을 때, 그는 맞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우리 이야기꾼들은 진실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야기속에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과 메시지를 교묘하게 끼워넣어 꿈과같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진실로 우리의 위험성을 제대로 꿰뚫어보았다.”

우리가 하고픈 이야기를 꿈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진짜 이야기이고, 진짜 작가의 작업이다. 그러나 요즘에 도처에 범람하는 웅변과 웅변가들을 보고 있으면, 적어도 지금 시대는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의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들른 영화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어떻게 급박하게 돌아가건간에, 나의 소소한 일상 역시 도르륵 말리는 괴나리 봇짐마냥 소소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사실 영화관을 찾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연극을 시작한 이후로는 정말 영화라는 매체에 어떤 절실함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매번 살아있는 배우를 눈앞에서 마주하다 보니 영화를 볼 때면 뭔가 죽어있는 것을 마주하는 느낌에 견딜수가 없어서’ 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죽어있는 뭔가를 보러갔던 것은 극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심지어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연극판이라는 세계에서도 살짝 염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정말 제정신으로는 견디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헌데 영화관에 가서 본 영화가 하필이면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였다. 아카데미 영화제 4관왕에 빛나는 이 영화를 보며 나는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헐리우드에서조차 PC함 (정치적 올바름)이 대세라고는 하나, 이런 웅변을 보고있어야 하다니. 그나마 <셰이프 오브 워터>가 명동 예술 극장의 <리어 왕> 보다 나았던 점이라면 이야기의 진행과 캐릭터를 깨면서까지 웅변이 나온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기사 그랬다면야 양심적으로 아카데미 4관왕이 말이나 되겠냐마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좋은 영화였다. 분명 좋은 영화였다. 길예르모 델 토로 특유의 꽉 짜여진 정교한 세계관은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이었고, 특유의 환상적인 미술은 자체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났으며, 연기는 한치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앙상블이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이야기는 너무 단조롭고 단순했다. 상징은 빈약하고 유치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캐릭터들의 평면성은 재앙에 가까웠다. 아무리 시대상을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남자들은 전부 찌질이에 젠더감수성이 제로에 수렴하며 결정적인 순간 니편도 내편도 없이 배신하는 멍청이들에 가까웠고, 여자들은 모두가 의리의 화신에다가 무능력한 남자들에 치이지만 진취적인 여성들로 그려졌다. 이런 단순한 도식은 정말 심하다싶게 영화 내내 이어졌는데, 심지어 그나마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대머리 이웃집 남자는 성소수자에 그나마도 주인공을 돕지 않다가 돕게 되는 이유로 나오는 것이 납득 불가능한 해프닝 수준으로 묘사되었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안타까움에 탄식을 지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길예르모 감독의 출세작인 <판의 미로>에서는 위와 같은 단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역량을 보아하건데 조금만 더 힘을 빼거나 그가 생각하는 노골적인 ‘시대정신’을 조금더 철학적으로 가다듬었다면, 이보다는 더 좋은 영화가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이런 PC함이라고는 해도 이정도로 노골적인 수준의 이념 찬양 영화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정말 보고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이야기보다 앞서 전면에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선전선동 영화와 다름이 없다. 내가 최근 느끼는 염증들은 이런 선전과 선동, 광장에서나 어울릴 웅변들이 이야기라는 매체로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결과물들로 나오는 것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자리에서도 상을 받는 등의 결과로 이어지니, 힘이 빠지기 그지 없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내가 좋은 이야기 좋은 작품이라고 믿어왔던 일련의 연극들조차 폭력적이고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성추문까지 동반한 폭력의 결과물들이었으니, 작가로서는 절망 그 자체였다.

이야기의 종말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시인들의 시대가 아님은 자명하다. 지금은 광장의 시대고, 웅변가들의 시대다. 그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에 광장과 웅변가들의 시대가 한번쯤은 지나가야함은 어쩌면 자명한 순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문가의 영역에 웅변가들이 침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 혹은 전문가들이 웅변가로 변절하는 것에 있다. 특히나 헐리우드 영화를 봐오면서 자란 나로서는 지금 헐리우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 많던 이야기꾼과 작가들은 다 어디에 가고, 웅변가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 많던 전문가와 꾼들은 어디에 가고 웅변가만 남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시대의 격변과는 별개로 일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당분간 광장과 웅변의 시대는 계속되겠지만, 세상만사가 웅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칸투칸의 제품이 가성비로 유명한건 실제로 가성비로 충만한 제품을 만들어서이지, 제품의 겉표면에 ‘가성비’ 라고 세글자로 써놔서가 아니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실제 그 제품 혹은 사람의 가치와 철학은 제품 혹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드러나고 알아보기 마련이다. 봄이 곧 다가오고 있다. 4년 전에 샀던 아쿠아 트레킹 슈즈는 겉표면에 뚫린 구멍으로 작은 돌멩이나 이물질이 너무 많이 들어와 불편했다. 최근에 찾아본 아쿠와이어 슈즈는 아예 다른 제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업그레이드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불만들이 다 대동소이했는지, 금방금방 피드백이 되어 불만족스럽던 부분이 싹 고쳐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올 봄에는 아쿠와이어를 하나 사야겠다. 무엇보다 신발 겉표면에 글자같은게 안 써져서 참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