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천국, 모두의 현실

육아는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여자 친구와 서른 동갑내기이고, 여자 친구는 일란성 쌍둥이의 언니다.(정말 똑같이 닮았다.) 우리 셋은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고, 지난 이십 대 내내 알고 지낸 덕에 지금은 친구 이상으로, 가족처럼 편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내 부족으로 우리 커플은 아직 결혼하지 못했지만, 여자 친구 쌍둥이 여동생(이하 D로 표시)은 이미 2015년에 결혼해서 슬하에 두 돌을 맞은 첫째 딸과 이제 겨우 생후 1개월이 다 되어가는 둘째 아들이 있다. 야무지고 똑 부러지던 D는 이제 우리 친구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을 꽤 능숙하게 해나가고 있다.

원래도 아기들을 보면 환장하는 나는, 이미 D네 아기들의 ‘조카 바보 예비 이모부’로 등극했다. 첫째 딸은 나를 보면 애칭인 ‘바트’라고 부른다. 아직 한 줌의 존재인 둘째 아들은 얼마 전 D의 친정이자 여자 친구의 본가인 김해에서 안아서 재우고, 젖병을 물리며 내 존재를 여실히 어필했다. 우리 셋은 사이가 돈독한 편이라 1, 2주에 한 번씩은 D네 집으로 가서 아기를 보고 수다를 떨곤 했는데, 벌써 아이 둘의 엄마가 된 D를 보면서 나는 ‘정말 육아란 보통 일이 아니구나.’하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열 달 동안 제 몸에 아이를 품는 것이나 생살을 찢으며 한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출산의 고통과 수고로움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산후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감정 기복과 산후 우울증, 온몸의 뼈마디가 일그러졌다가 제자리를 찾는 괴로움, 2시간 간격으로 젖을 먹이기 위해 제대로 된 잠은 일찍이 포기해야했고, 그 사이에도 모유를 먹이기 위해 유축을 하고,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달래는 D를 보면 문득, 내가 알던 동갑내기 친구가 아니라 존경스러운 엄마의 자태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뭘 많이 공감하는 것처럼 적었지만, 엄마로서의 출산과 육아란, 결국 나는 겪지 못 하는 추측의 영역일 뿐이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불편함과 수고로움이 동반되는 일일 것이다. 하필 여자 친구와 D가 일란성 쌍둥이라, 가끔 D의 피곤한 표정이나 지친 뒷모습을 볼 때, 여자 친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내 마음이 더 짠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엄마가 된다는 건 아름답고 거룩한 대의명분 이상으로,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잠시 찾아온 각자의 천국

산후 조리원에서 나온 후 친정에서 몸을 푸는 동안에도 D의 생활이 편안해보이지만은 않았다. 특히 이제 겨우 두 돌을 맞은 첫째 딸이 상실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둘째 아들을 온전히 보살핀다는 게 그랬다. 마냥 신나서 뛰고, 소리 지르고, 까르르 웃는 첫째의 즐거움과 행복이 둘째의 스트레스가 되는 지점은 누구라도 풀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때문에 첫째는 첫째대로 즐거움을 제지하는 어른들의 말에 상처 받고, 둘째는 둘째대로 불안정한 환경에 지쳐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째는 감기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산모인 D의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부산 자기 집으로 돌아간 D가 여자 친구에게 전화와서 청천벽력 같은 얘길 전했다. 둘째가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거다. 병원에선 극심한 스트레스로 갑상선 수치가 높아지고, 감기 기운까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D는 자기 몸도 온전치 않으면서 모든 게 제 잘못인 것만 같아 울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중에 설 연휴가 닥쳤다. 원래는 D와 함께 있기로 했던 첫째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직접 데리고 친척 집에 가기로 했다. 다행히 첫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좋아했다. 둘째는 최소한 일주일은 입원해야 해서 하루 한 번, 30분 정도 면회 때만 볼 수 있었다. D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설 연휴 동안 집에 혼자 남게 됐다.

그 과정의 서러움이나 긴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첫째와 둘째, 그리고 D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심신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첫째는 시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친척 집을 순회하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영상 통화를 걸었더니 “엄마!” 외치고는 논다고 정신없이 달려갔단다. 둘째는 갑상선 수치도, 감기 기운도 나아졌을 뿐 아니라 살까지 포동포동 오르고 있었다. D는 아이 둘 다 없는 집에서 간만에 방해 받지 않는 휴식을 취했다. 모유 수유를 위해 미역국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잠도 푹 잔다. 설 연휴 동안 D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여자 친구는 내게 돌아와서 “어떻게 하다 보니 첫째, 둘째, 그리고 D는 잠깐이지만 각자의 천국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각자의 천국.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각자의 천국, 모두의 현실

각자 만족스럽게 휴식을 취하고, 회복하는 며칠의 시간. 그 시간을 ‘각자의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그걸 ‘천국’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면, 문장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살면 될 것만 같다. 누구는 내세에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 현세의 모든 에너지를 쏟기도 한다는데, 그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천국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런 ‘각자의 천국’이란 건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D조차도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의 휴식과 지금의 편안함, 그 천국 같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첫째와 둘째에게는 엄마, D가 필요하다. 아무리 자유가 즐거워도 그건 D가 첫째나 둘째를 내팽개치고 저 혼자 살아가고 싶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각자의 천국’ 속에서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의 현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 ‘모두의 현실’은 ‘각자의 천국’보다 고되고, 우울하고, 막막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천국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이유는,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수지 안 맞는 행복을 좇는 이유는, 현실의 것들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소중한 것들 때문에 현실을 산다. 소중한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강하다.

설 연휴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각자의 천국’도 막을 내리고, D는 다시 아내, 며느리, 그리고 엄마로서 서로 부대끼는 ‘모두의 현실’을 시작할 것이다. 조만간 여자 친구와 D의 집에 놀러가서 아기들을 돌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아직 말귀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첫째와 목도 가누지 못하는 둘째에게, 너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고 싶다. 너희 엄마는 바로 너희들을 위해서 천국보다 현실을 선택했다고. 너희 엄마에겐 천국보다 귀한 존재들이 바로 너희라고. 그러면서 나도 어렴풋한 기억을 보듬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나도 한때 천국보다 귀했던 시절이 있었겠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