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말고 ‘시장’

근대 남성에게도 어려운 ‘전통’

주변 지인들이 나를 부르는 여러 별칭 중에 하나가 ‘근대 남성’이다. 첨단 기기나 신문물에 대한 반응 속도가 워낙 느리고, 굳이 간편한 방법을 두고서 “늘 이렇게 해 와서 안 귀찮아.”라고 말하는 탓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공인인증서 복사만 하면 스마트폰으로 이체할 수 있는 걸 굳이 ATM 기계를 찾아 계좌이체를 했던 것 정도. 다행히 지금은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증상(!?)은 대충 이 정도였다. 아마 4차 산업 혁명 이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미래에도, 시골의 어느 골목에 서 있는 색 바랜 우체통처럼 ATM 기계가 남아있다면, 그건 아마 나 같은 사람들 덕분(!?)이겠지.

그런데 ‘근대 남성’ 이라는 별칭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 나조차도, 스스로 아날로그의 감성을 사랑해서 굳이 중고로 수동 타자기를 사서 글을 쓰는 나조차도 요즘 회의적인 단어가 있다. 바로 ‘전통시장’이다. 예전에 ‘재래시장’으로 불렸던 것이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이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으로 법명이 변경되면서 ‘전통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 옷(!?)을 입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전통시장’이란 표현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전통…?

단어를 쓸 때는, 단어의 뜻부터 알아야 한다.

‘재래’ 와 ‘전통’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이렇다.

재래 : 예전부터 있어 전해 내려옴.
전통 :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단어의 뜻을 알고 나니, 나는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재래시장’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예전부터 쭉 있던 시장’이라는 뜻인데, 이건 그냥 시간의 선후 관계에 따른 표현이니 걸고넘어질 일이 없다. 그런데 굳이 ‘전통시장’이라고 부르고 나면, 온통 의아한 것투성이다. 도대체 지금 현존하는 ‘전통시장‘에 ‘계통’이나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이 뭐란 말일까. ‘2인분 같은 1인분’을 이해하는 인정의 문화? 대형마트보다 값싸고 질 좋은 제품?? 가격 흥정??? 더 이상 전통시장에 그런 허상들이 없다는 것쯤은 전통시장을 애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겠지. 흔히 우리가 ‘전통’ 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긍정적, 부정적 이미지들이 있다.

긍정적 이미지 : 민족의 정체성, 장인 정신, 보존해야할 문화, 정, 가치 있는 것
부정적 이미지 : 오래되고 낡은 것, 고리타분한 것, 불편한 것, 불청결한 것

하지만, 우리가 ‘재래시장’ 아니 ‘전통시장’을 떠올릴 때 과연 긍정적 측면의 요소들이 거기 얼마나 배어 있을까. 앞서 얘기한 인정이나 사람 냄새 같은 허상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뭔가 오래되고, 낡았고, 친근하긴 하지만 왠지 불청결하고. ‘전통시장’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족쇄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전통시장’은 ‘전통시장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규정이 하나의 족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도시가 개발되고 대형 마트가 들어서서 전통시장의 입지가 위협받는다면, 전통시장의 현대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는 게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왜 전통시장은 ‘뭔가 덜 발전되고, 덜 세련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이미 많은 전통시장이 현대화되었고, 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각 시의 주요 전통 시장들이 현대화되었고, 상인들은 물론 소비자들 역시 이런 현대화의 덕을 보고 있다. 그럼 이 ‘현대화 사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전통-현대’ 서로 대립하는 단어의 뜻 사이에서 무엇이 현대화되고 무엇이 전통으로 남아있단 말일까. ‘현대화 사업’의 주요 요지는 ‘시설, 설비의 현대화’ 와 ‘상인들의 상업 활동 지원을 위한 제도적 현대화’가 두 축을 이룬다.

‘시설, 설비의 현대화’는 말 그대로 열악했던 상점 시설을 현대화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전통시장의 열악한 환경은 여름과 겨울에 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큰 걸림돌이었다. 혹서나 혹한의 날씨에도 가건물 수준이거나 거의 거리에 판을 벌리는 시설로 버텨야 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악하게 냉난방 시설을 구비하다보니 전력 낭비는 물론이고 화재 위험을 떠안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나마 건물이랍시고 있던 것들도 죄다 안전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었고, 나무나 스티로폼으로 속을 채워 한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게 번지는 재료들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현대화하고, 재해 예방 스마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설, 설비의 현대화’의 주요 사안이다.

한편, ‘상인들의 상업 활동 지원을 위한 제도적 현대화’란 가장 단순하게는 ‘결제 수단의 현대화’부터 각종 화재 예방 대책, 캠페인, 화재 공제 가입 등등을 보완하는 것들까지 포함한다. 현금 외에 카드 결제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활용한 각종 ‘페이’ 등의 결제 수단을 확보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사전 예방과 사후 조치를 통해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현대화 사업이 이뤄진 후에도 대구 서문시장 화재 사고와 같은 참사를 겪을 수도 있고, 아직까지도 이런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지 못한 전통시장들이 많기 때문에, 지난 의정부 제일시장 화재 사고와 같은 참사를 또 겪기도 한다.

자, 그럼 ‘현대화된 전통시장’은 전통시장인가?

그렇다면 만약 모든 전통시장들이 현대화되고 나면, 그 ‘현대화된 전통시장’도 여전히 전통시장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당연하다. 만약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야말로 ‘전통시장’을 왜곡된 ‘전통’이라는 족쇄에 가두는 셈이니까. 전통은 지저분하고, 낡고, 고리타분한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 다만, 이런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현대화된 전통시장’에서 어떤 ‘전통’을 찾을 수 있는가. 인정? 값싸고 질 좋은 제품?? 가격 흥정??? 여러번 언급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전통과 별 상관이 없다. 그냥 영세업장이나 소매업장이면 어디든 가능하고, 기대해볼 수 있는 조건들이다.

그나마 전통시장이 대형마트와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소규모 업체가 오랜 시간 자리를 잡고 다닥다닥 붙어 전통시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요즘엔 전통시장 내에도 핫도그 가게 같은 프랜차이즈 업체가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보면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따지자면 옥외냐 아니냐의 정도?

‘전통’이 아니라 ‘시장’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재래’나 ‘전통’같은 이름에 집작하기보다 ‘시장’이라는 공간적 특징에 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시장(市場)의 한자어를 직설적으로 풀어보면, 도시(市)의 마당(場)이다. 한 집의 마당이 아니라, 도시의 마당. 마당이란 어떤 곳인가. 아파트나 주택이 주요 주거지가 되어버린 요즘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장소. 반려동물이 뛰어놀던 곳. 가족이 모여 과일을 깎아 먹거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줄넘기를 하기도 하던 곳. 잔치가 있을 때나 장례를 치를 때, 축하와 위로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리타작을 하고, 고추를 말리던 곳.

그런 마당이, 한 집안의 마당이 아니라 도시의 마당이라는 거다. 도시의 마당이 ‘시장’이라는 거다. 그러니 사실 ‘재래’니 ‘전통’이니 하는 단어들은 어쩌면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갈지 모르나, ‘시장’만큼은 언제고 살아남을 단어다. 시장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생계를 꾸리고, 물건을 사고판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사람의 일일 것이다. ‘재래시장이라서, 전통시장이라서’라는 이유로 시작되는 불편과 불만들을 종식시키고, ‘대형마트-전통시장’이라는, 마치 ‘골리앗-다윗’ 같은 불리한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강점을 지니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통시장’이 아니라 ‘서문시장’. ‘제일시장’, ‘동상시장’과 같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시장 생태계를 구축해야할 것 같다. 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영세 상인을 위한 ‘시혜’나 ‘애향’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단순히 개개인의 사정이나 선호 때문일 수 있어야 비로소 대형마트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시장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 아닐까. 언젠가 ‘전통’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진짜 ‘시장’이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