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관한 상념
  1. 슈퍼 문의 악몽

슈퍼 문, 블러드 문, 블루 문… 달의 크기나 색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특히 가장 최근인 1월 31일에 떴던 달은 그 이름이 무려 ‘슈퍼 블루 블러드 문’이란다. 어릴 적 애청했던 만화영화 전투 씬의 대미를 장식하는 특급 필살기 이름 같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엄청난 걸 못 봤다. 아니, 사실 귀찮아서 안 봤다. 원래 그런 거 잘 챙겨 보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유난히 ‘무슨, 무슨 문’이 몇 십 년 만에 뜬다는 기사를 많이 접해서 그런 걸까.(너무 많은 희귀한 ‘문’들이 너무 흔하게 출몰했던 것 같은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심지어 이번 ‘슈퍼 블루 블러드 문’은 35년 뒤에나 볼 수 있다던데. 음, 환갑 이후에나 다시 만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슈퍼 문’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2015년, 재수학원에서 수능 국어를 담당한 첫 해에 2014년 11월에 치러진 수능 국어 시험을 분석해야할 일이 있었다. 수능 치고 바로 대입에 성공한 수험생들이야 수능 시험지를 다시 쳐다볼 필요가 없겠지만, 재수생들에게 전 년도 수능 시험지는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면서도 가장 열심히 분석해야할 애증의 시험지다. 그리고 그 2014년 11월에 치러진 수능 국어는 난이도가 꽤 높았고, 그 중에서도 ‘슈퍼 문’의 발생 배경과 현상의 원인을 주제로 하는 비문학 지문의 난이도가 극악이었다. 특히 나처럼 ‘문송한’ 사람이라면, 그게 학생이든 강사든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분노와 후회, 다짐, 회의, 뭐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응축된 상태에서 처음 만난 재수생들은 나와의 첫 시간부터 슈퍼 문 비문학 지문을 들이댔다. 자기들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질 않으니, ‘강사’인 나에게 해설을 해달란 거였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이심률이니 타원의 초점이니 하는 것들을 알고 있었겠나. 수능 비문학 지문의 출제 의도가 ‘배경 지식의 활용’이 아니라 ‘지문 독해’라고는 하지만,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전후 논리의 궤가 들어맞으려면, 최소한의 배경 지식은 필요한 게 사실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직하고 공손하게, 분석이 마무리 되면 완벽한 해설 강의를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고, ‘타원의 초점’과 ‘근일점, 원일점’, ‘근지점, 원지점’, ‘태양, 지구, 달’의 궤도 등을 온전히 이해한 다음에야 해설 강의를 해줄 수 있었다. 내가 지문을 읽고 문제를 맞히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걸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건 다른 차원이니까.

문제는, 그 ‘슈퍼 문’ 지문이 그 이후로도 3년 내내, 내가 학원을 퇴사하기 직전까지 따라다녔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재수생들은 5개년~7개년 정도의 모든 모의고사를 풀고 분석하게끔 지도하다보니, 매년 해설 요청 지문 리스트에 ‘슈퍼 문’ 지문이 있었다. 이미 분석을 다 끝낸 후라, 해설하는 거야 어려움이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아, 슈퍼 문. 그냥 보름달 중에 제일 큰 보름달. 제일 가까운 보름달. 토끼가 열심히 절구에 떡방아를 찧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달! 그 정도로만 이해하면 안 될까,하면서.

  1. 달 보기 어려운 시대

요즘은 ‘무슨, 무슨 문’이 뜬다는 뉴스가 아니면 부러 달을 보려는 사람도 적지만,  달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봐도 달 보기가 참 힘들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부산만 해도 그렇다. 굳이 서면이나 남포동, 연산동, 동래 같은 번화가의 높게 솟은 빌딩 숲을 탓하지 않더라도, 동네 골목에서조차 원룸 건물이나 빌딩에 가려서 밤하늘이 조각나 있다.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남천동은 조금만 걸어 나가면 시야가 탁 트인 광안리 해변이 있다. 회색, 보라색, 검푸른 색까지 오묘하고도 짙은 색을 품고 있는 밤하늘에 뜬 환한 달. 가끔 그렇게 광안리 해변에서 달을 보고 있으면, 극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두컴컴한 실내, 그 중에 환한 스크린, 그리고 그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보는 사람들.

그래서 비디오 아티스트 故 백남준 선생께서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을 만든 걸까. 12개의 TV 화면들은 달을 상징하는 흰 구체가 초승달부터 보름달에 이르는 과정을 비춘다. 동시에 12개의 시공간이 훅, 다가오는 것이다. 토막이기도 하고 연속이기도 한, 순간이기도 하고 영원이기도 한 시공간이.

故 백남준 선생은 이 작품을 두고 1982년 회고전 당시 “달을 보고 토끼가 떡방아를 찍고 있다고 상상하는 민족은 한국인과 중앙아시아인들 뿐이고 여기서 달 TV를 구상하게 되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지구의 유일한 위성인 달을 바라보며 이미지를 투영하고 이야기를 상상하던 모습을 텔레비전 시청에 빗댄 것’이다. (출처, 백남준 아트 센터 http://njp.ggcf.kr/) 故 백남준 선생의 작품 의도대로라면 지금에 와서 그 예전만큼 사람들이 달을 바라보지 않는 것은 TV의 탄생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여기서 TV란 무수히 많은 ‘볼 것들’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겠지만.

그럼, 우리가 달 대신 TV로 상징되는 것들을 더 많이 보는 일의 득실은 무엇일까. 사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TV, 스마트 폰, PC 등등 ‘볼 것들’이 가진 기능이나 방대한 정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재미까지. 지금의 ‘볼 것들’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게 해주기도 하고, 지식을 쌓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해주기도 한다. 예술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달을 바라보는 일에 아무리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도,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을 가장 밀접하고 실감나게 지탱하고 이루는 것은 달이 아니라 지금의 ‘볼 것들’인 것 같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달을 바라보는 일의 가치를 꼽아본다면 아마 ‘상상력’ 아닐까. 야심한 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 소리나 밤새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캄캄한 공간에서 달의 못난 크레이터 자국을 바라보던 오랜 과거의 인류. 마치 일일드라마처럼 매일 떠오르는 달, 매일 모양을 조금씩 바꾸는 달을 보던 그들이 그 크레이터 자국에서 맨 처음 토끼와 절구와 떡방아를 찾아낸 순간. 그 순간의 상상력은, 요즘 시대의 ‘볼 것들’에서 발현되는 상상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상과 창작의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이 널린 요즘과 달리, 그 시절(‘시절’이라고 부르니까 왠지 멀지 않은 과거를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위화감이 들기는 한다.) 달과 토끼와 절구와 떡방아의 상상력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이었을 테니까.

만약 온 세계를 창조한 신이 있다면,
아마 달은 신이 인간에게 파종한 상상력의 첫 씨앗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