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과 카타르시스

 

울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고통스러워도 울고, 서럽고 슬퍼도 울며, 화나도 울고, 짜증나도 울고, 기뻐도 울며, 좋아도 울고, 감동적이어도 운다. 사람의 감정 표현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게 어찌 보면 이 울음일 것이다. 이 울음에 종류가 있다는 게 재밌지 않은가.

사람이 한가지 이유 때문에 울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울음이 가져다주는 효과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울음이 ‘감정의 정화’를 시킨다고 봤다. 울음이 감정의 쌓이고 막힌 것을 풀고 해소해주는 일종의 ‘감정적 배설’ 기능을 한다고도 봤는데 어쨋거나 이 ‘감정의 정화’를 일컬어서 ‘카타르시스’ 라고 했다.

대학 시절에 독서 치료사 과정을 이수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말만 독서치료지 거의 심리 상담에 대한 수업이었다. 이 독서치료 수업에서도 역시 이 ‘카타르시스’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정확히는 ‘카타르시스’ 보다는 ‘울음’에 더 중점을 두었다. 내담자와 책을 읽고, 책의 내용과 주인공에 공감하거나 이입하고, 혹은 거부하는 걸 듣고 관찰하고, 서로 신뢰를 쌓는 과정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보인다면 이것은 좋은 징조라는 것이었다. 수업 자체도 상당히 겉핥기 식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 기억이 나지만 어쨌거나 ‘울면 장땡’ 이라는 식의 수업 내용이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는 수업 중간에 실습을 하며 한 학생에게 가족에 대한 사적이고 대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교수와 수업중이라는 분위기를 이용해서 계속 유도했고, 결국 그 학생이 울음을 터뜨리며 과거의 내밀한 이야기(나 같은 사람은 별로 그 수업에서 잠깐 보고 말 그 학생의 내밀한 과거 따위 알고 싶지 않았으나)를 털어놓게 했다. 학생이 울자 교수는 ‘울음은 독서 치료에서 중요한 요소이죠’ 라며 되도 않는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교수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학생이 울자 여기저기서 안쓰러운 탄식에, ‘괜찮아 괜찮아’ 식의 갑작스런 감정적 응원, 절친의 따라 울기 같은 현상들이 벌어져 더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비슷한 종류의 분위기는 작년에 문화 예술 지도사 자격증을 따며 교육 연극 실습 수업에서 벌어졌는데, 다행히 이 수업에서는 ‘울음’ 보다는 ‘카타르시스’에 더 중점을 두었다. 가장 중요한 건 학생이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직접 몸으로 표현하고 입으로 말을 하게 한다’는 과정이었다. 특히나 그 과정에 있어서 연극은 특화된 장르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미 연극을 전공한데다, 직업이 연극이었던 수많은 학생들(나를 포함해)은 자신들이 배웠던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과 기능을 발견하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신파 논란

 

최근에 개봉한 영화 <신과 함께>는 1000만을 돌파하며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헌데 이 영화가 꼭 호평 일색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영화의 뻔하디 뻔한 눈물 짜기 패턴’ 이라며 이 영화를 비난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안 봤다.

몇 년 전 개봉한 <국제시장>은 이런 면에서는 거의 교과서에 가까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미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이라는 코드를 전면에 내세웠던 이 영화는 예고편에서부터 이미 자신들의 목적이 ‘울고불고 질질 짜게 만드는 것’ 이라는 것을 잘 어필했다. 사실 이건 기획 단계에서는 꽤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 본인들의 작품의 장르를 알고 강점을 알고 어필한다는 건 예술 창작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실 이런 ‘가족’ 이나 ‘눈물’, 거기다 ‘민족 감정’까지 끌어오는 이런 류의 영화에 극도의 혐오와 거부감마저 가지고 있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예고편 막바지에 삽입된 늙은 황정민의 대사인 ‘이만하면 나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에서는 눈물이 왈칵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물론 예고편을 보고나서 본편까지 본 건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를 안 봤다.

작년에 또 재밌었던 것은 영화 <부산행>의 신파 논란이었다. 좀비 영화에 신파라니! 사람들은 또 신나게 영화의 관객수를 늘려주면서도 도대체 한국영화는 좀비에서까지 신파를 해야하냐며 탄식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해외 영화 관객들의 평을 퍼나르면서 ‘그래도 한국 신파가 외국 나가니까 신선한가보다!’ 며 재밌어했다. 물론 나도 재밌어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안 봤다.

신파로 논란이 된 이 세 영화는 안봤지만, 나는 작년에 꽤 의미있는 연극들을 봤다. 한국 연극의 거목인 이윤택 연출의 극단 <연희단 거리패>가 30주년을 맞아 시리즈로 제작한 ‘굿과 연극’ 시리즈 공연이었다. 한국의 상갓집 풍경을 그린 오구굿의 <오구>부터, 제주도별신굿 을 소재로 한 <초혼>, 그리고 진도 씻김굿을 소재로 한 <씻금> 까지.

세 개의 연극은 공간도 인물도 다 다르지만 진도, 제주, 한국의 전승 굿(귀신에 씌여서 점을 치는 신내림 굿이 아닌, 가문의 전승으로 이루어지는 기승전결을 갖춘 공연 양식의 제의, 굿)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무대에서 한국의 전통 전승 굿의 양식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연극의 이야기 형식에 맞춰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이 세 개의 연극, 그리고 세 개의 굿을 보면서 나는 몰랐던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실마리 하나를 얻었다.

바로 굿이라는 형식이, 한국인이 스토리 텔링에 기대하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은 어떤 형태의 스토리 텔링에서도 ‘굿’을 기대한다. 영화에서든, 연극에서든, 음악에서든, 티비 드라마에서든, 동네 미용실에서 듣는 시시콜콜한 동네의 가십에서든 말이다. 그렇다면 ‘굿’을 기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굿에는 공통적으로 ‘무당’이 나오고, 이 무당은 혼들을 불러오는데, 이 혼들은 주로 ‘억울하게, 혹은 힘들게, 고생만 하다 죽은’ 혼들이다. 이들을 불러내 이들의 사연을 묻고, 듣고, 춤과 노래로 달랜 뒤, 마지막엔 고생했다면서 같이 엉엉 울고 좋은 곳으로 휘휘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가고, 실제로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정말로 굿으로나마 풀고, 정말로 이 굿의 현장에 나왔는지, 이 모든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었다고 생각한 자를 관객인 굿의 참여자들이 불러내서 묻고, 듣고, 노래하고, 춤추고, 잔치 음식을 먹고, 술에 취하고, 엉엉 울고, 같이 공감한 뒤, 자신의 고통과 시름과 아픔과 슬픔도 함께 혼에 실어서 보내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카타르시스의 과정이다.

즉 한국인들이 신파를 이야기하며 신파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이걸 한국인들이 안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지, 한국의 창작물에서 신파를 없애니 마니 하는 것은 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분석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정확히는 신파를 원한다기보다는 이 ‘굿’을 원하는 것이다. 헌데 산업화와 근대화 도시화가 진행되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이제 ‘굿’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없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굿’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에 남았는데, 실제로 ‘굿’이 없어졌으니 굿을 대신할 수 있는 ‘대리 굿’ 으로서 신파 드라마, 영화, 음악 등을 찾는 것이다.

 

굿으로 다 해결할 순 없다

 

나는 굿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굿은, 그러니까 사람이 신파를 보고 울려고 하는 심리는 결국 ‘감정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고, 그건 사람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한국인으로서의 본능적인 노력인 것이다.

또한 신파라는 이름의 이 굿은, 형태상으로 완벽하게 카타르시스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실 이야기 구조로서는 아주 강력하고 원형적인 서사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신파에 가지는 거부감은 ‘눈물’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눈물로 가는 억지스러움’에 있다. 이 억지스러움이나 디테일에서의 세밀함을 더해 잘 만든 신파(굿)은 관객도 평론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이 신파라는 이름의 굿이 예전부터 그래왔듯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쭉 먹히고 있고 팔리고 소비되고 있다는 ‘현상’에 있다. 나는 이 신파가 팔리는 현상 자체가 어떤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징조나 진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신파(굿) 영화가 1000만을 찍는 시대라면, 사람들이 강력하게 ‘굿’을 통한 감정 해소를 원하고 있다는 징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굿’의 특성상 불의한 사회 시스템이나 억압적 구조에 대해서 직접 소리치고 분노하고 반항하는 게 아닌, 순응하며 힘들다고 혼자 울고 해소하고 말아버리는 형식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사회나 시스템 같은 다른 곳에서 발아한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신파(굿)에서는 오히려 해소가 됨으로써 가려지고 뒤로 묻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굿’ 이라는 형식을 통해 감정을 해소하는데는 능숙하지만, 오히려 분노하는 데는 약하다. 작년의 촛불 집회도 비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광장에서의 각종 공연과 추모 행사들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동학 농민 운동 같은 민중봉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대규모 ‘굿’에 가까웠다.

‘굿’은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 않는게 문제다. ‘굿’이 해결해주는 건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 즉 카타르시스이지, 뭔가 깨닳음, 움직이게 하는 동기부여는 주지 않는다. 흑인들의 ‘영가’는 노예 시절 현실을 전혀 바꾸고 이겨낼 수 없는 체념의 감정에서 나오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스며든 노래지만, 세월이 흘러 ‘소울’뮤직은 결국 흑인 민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저항과 반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굿’에는 영가에서 소울이 된 것 같은 진화의 방향이 없다.

무엇보다 ‘굿’은 한국인들에게 이상한 버릇을 들여놨는데, 바로 중요한 순간에 울어버리는 행위가 잦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회의 구성원들도 이 ‘눈물’에 약하다. 약자가 저항하는 방법 또한 ‘눈물’인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엔 이 눈물에 얼마나 많은 이가 공감하느냐에 따라 저항의 파괴력이 세지고, 그게 아닐 경우 약자의 눈물은 그냥 묻혀버리고 만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자리에서도 그냥 울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경우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똑같이 눈물의 편에 그냥 서버리기도 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본인이 잘못을 한 자리에서 이성과 합리로 잘잘못을 가리고 명명백백히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자리가 있다 치자. 이 자리에서 잘못한 사람이 울어버린다면? 한국에서는 이상한 동정 여론이 형성될 여지가 아주 크지만, 만일 이게 미국이나 유럽이었다면? 공적인 자리고 잘잘못을 가리는 데 운다? 그냥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농담이 아니다. 한국은 눈물에 과할 정도로 후하다.

눈물은 감정의 해소와 승화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감정적 배설이다. 눈물이 넘치는 사회는 체념의 사회이고, 온갖 배설물들이 난무하는 사회기도 하다. 다만 그 배설물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방치하는 것 뿐. 그러나 굿에서처럼 이 살아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해 결국 죽은 혼을 불러와 달래야 하는 눈물 같은 배설물들은, 결국 근본적 해결이 없기 때문에 쌓이고 쌓여 썩기 마련이다.

 

리얼리즘

 

한국의 예술가들이 이룩하지 못한 단 하나의 지점을 말하라면 음악에서는 펑크, 즉 반항이고, 스토리 텔링에서는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이다. 둘다 한국인들이 못하는 것인데, 체념 지향적이고 분노하지 못하고 눈물을 좋아하는 특성상 공통분모를 가진다. 반항과 현실의 사실에 대한 관찰은 체념과 눈물과는 정 반대의 지점에 있다.

리얼리즘의 강국이라면 멀리는 러시아고, 가까이는 일본이다. 특히나 일본의 리얼리즘 예술들은 정말 주목할 만 한데,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만 보면 거의 완벽한 정형에 가깝다. 동양적 감성까지 더해서 일본의 리얼리즘은 역사상 유래없는 아주 독보적인 지점을 이뤄냈다고 봐도 좋다.

우리는 흔히 일본의 영화들을 보고 지나치게 소소하고 서사가 없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신파(굿)의 관점에서는 인물의 목표와 갈등이 너무 현실적으로 작고, 카타르시스의 과정이 지나치게 담백하고, 폭발의 순간은 너무 약하며 존재하지 않는듯한데다, 눈물이 없기에 서사 없는 소소함으로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작은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섬세하고 내밀하며, 현실적인 관찰에 근거한 공감과 몰입을 끌어내기에 담백하며, 폭발의 순간은 아주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억지로 울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일본의 리얼리즘 대가들은 진정으로 ‘카타르시스’가 뭔지 아는 예술가들이다. 우리가 아는 한국 신파(굿)의 ‘카타르시스’는 사실 그저 ‘배설’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세상이 어느정도는 변했다고 생각한다. 주인어른의 채찍질에 그저 주저앉아 울면서 노래나 부르고, 맞아죽은 아버지 어머니의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혼령을 불러내어 달래고 축원하고 좋은 곳 보내는 굿으로만 감정을 해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불의한 것이 있으면 화내고 들고 일어나 뒤집어 엎고 때려부수는 반항 정도는 해도 된다.

나는 그저 배설이나 해소가 아닌 진짜 승화와 감동을 원한다. 우리에겐 과거 눈물과 노래와 춤으로 점철된 굿이 필요한 시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가가 소울이 되었듯, 굿도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제는 굿보다는 리얼이다. 현실을 보고, 사실을 직시하고, 울고 짜고 끝낼 게 아닌 현실을 관찰하고 문제를 정확히 파악한뒤 담백하고 정직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굿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굿 이상의 새로운 무언가를 우리가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