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orious

 

재능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때로 아주 굉장한 특권처럼 느껴진다. 사실 맞다. 예술, 특히나 창작을 하는 계통에서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느끼는 사실들이 있다. 어느 계통에서나 창작은 일정 부분 완전히 ‘타고나야’ 한다. 보통은 그걸 ‘재능’ 이라고 부른다. 나는 한때 이 ‘재능’에 관련해서 꽤나 고통을 받았다. 물론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이 ‘재능’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과연 나한테 이게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있다한들 과연 나의 이 ‘재능’이란 게 나를 먹고살만하게 해줄만한 것인지 등.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재능’은 앞서 말했든 아주 ‘일정 부분’이다. 로버트 맥키가 쓴 희대의 명저 <The Story>(한국 출판명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는 재능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재능이 없다면 분야를 막론하고 절대 가망도 가능성도 없다. 당장 때려쳐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는 무의미한 고민이다. 재능이 없다면 일말의 호기심도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내가 기억에 의존해 약간 윤색하고 요약한 버전이긴 하지만, 로버트 맥키가 선언한 저 말로 나는 재능에 관련된 모든 고민과 정의를 집어치웠다. 그랬다. 내겐 재능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게임으로 치자면 재능이 무슨 -99부터 +99까지 쭉 수치화할 수 있어서(실제로 수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누구도 모르지만) 누구는 33점, 누구는 55점 같이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날두는 88점, 메시는 91점. 베토벤은 73점, 모차르트는 96점.

설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있을까 모르겠는데 다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다. 게임으로 쳤을 때 재능은 수치화할 수 있는 능력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게 있느냐, 없느냐 로만 존재하는 히든 능력치나 성향 같은 거다. 재능은 말 그대로 Yes or No.

즉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는 모두 재능이 있다. 그 재능들 사이에 우열은 없다. 다만 내가 어떤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는 재능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재능이 있는 분야에 내가 얼마만큼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몰두하고 인생을 투자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특히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재능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이 분야에 재능도 있지만, 이미 이야기 창작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쓰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났다. 그게 제일 중요한거다. 특히나 이야기 창작이라는 분야는 투자한 시간과 거기에 본인의 삶과 철학 경험이 중요하다. 순수하게 글쓰기만 공부한 사람이 암만 내가 천재입니다 해도 1년 썼으면 10년 쓴 나보다는 못할 것이다. 정말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30년간 법조계에 몸담고 있단 판사가 쓴 법정 소설은 그가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1년만 했더라도 내가 쓴 것보다는 재밌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재밌게 정제하는 것은 또 그 분야의 전문성이기 때문에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천재

재능과 관련해 사람들이 믿고 있는 환상 중 하나가 바로 ‘천재’의 존재이다. 천재가 있기는 하다.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어느정도냐면 거의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 혹은 무함마드처럼 하나의 종교를 창시할 만한 성인이 탄생할 확률이다. 가장 최근에 나타났던 천재는 음악에서였다. 바로 모차르트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이전과 이후로 천재란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다.

펄쩍뛰며 반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안한데 다빈치의 예술은 그냥 어느날 뿅하고 나타난 게 아니다. 뼈를 깎는 연습과 시행착오, 인체를 일일이 해부해보면서 스케치를 해댔던 지난한 고행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리오넬 메시는?

리오넬 메시가 축구공을 만지자마자 프로에 데뷔했나? 그의 데뷔가 빨랐고, 그의 골이 환상적이긴 했지만 포텐셜이 완전히 터졌던 것은 펩 과르디올라 감독을 만난 후였다. 그전까지의 영양섭취를 등푸른 생선 위주의 식생활로 바꿀 정도로 각별한 관리를 받고 팀에서 중추적인 전술속에서 성장한 후 비로소 세계 최고가 되었다.

그럼 모차르트는 뭐 다르냐? 할 수 있겠지만 다르다. 모차르트만이 이런 기술의 축적 과정을 거의 건너뛰다시피 했다.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비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인간적으로 빨랐다.) 모차르트는 3세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고 이미 5세때 작곡을 시작했다. 불과 35세를 사는 동안 626곡을 남겼다. 모차르트를 메시와 다빈치에 비교한다? 미안하다. 메시가 5세때 프리메라리가에 데뷔하고, 다빈치가 5세때 모나리자의 스케치와 초안을 완성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내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가장 최근의 천재가 모차르트이고, 다빈치와 메시가 천재가 아니란 말은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천재라는 단어를 오독하고 오용하고 있을 뿐이란 지적이다. 다빈치와 메시는 천재가 아닐뿐, 이미 또다른 명사로 그들의 업적을 칭송할 수 있다. 바로 ‘위대한 예술가’ 라는 단어이다.

 

기술자

여기서 알 수 있듯, 예술은 어느 정도는 기술의 영역이다. 단적인 예로 극작가를 보통 Play-writer 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극작가는 영어로 Playwright 이다. Play는 희곡이고 wright 은 면직물을 직조하는 직조공, 또는 그런 방식을 뜻한다. 즉 면직물을 직조하는 기능공처럼 이야기(희곡)를 직조해나가는 것, 그것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들 하는 착각인데, 예술에서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주 높지만, 그게 있다는 걸 전제로 한 뒤로는 전혀 무의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00인에게 재능이 있다면 그들 사이에 전혀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바로 그 뒤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처절하고 눈물이 나고 이가 갈리고 악에 받치면서도, 때로는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관두고 싶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을 마스터하겠다는 도제들의 눈물겨운 사투인 것이다.

기능을 마스터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오래하고 여러번해서 몸과 마음에 새기고 익히는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고, 미술도 마찬가지고, 연기도 마찬가지고, 춤도 마찬가지며, 음악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음악은 예술 중에서는 기능공으로서의 난이도가 춤과 비슷하고 때로는 더 높은 최고 난이도에 속한다. 악기를 연주한다는 건 신체의 섬세함과 체력적인 파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연마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의 겉모습인 화려함에 취해서 그 뒤에 놓여있는 그 수많은 연마의 나날을 보지 못한다. 아니, 때로 나는 그들이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예술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성사되는 게 아닌, 때로 재능에 의해서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만 ‘딴따라’ 라고 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운좋게 재능이 있거나, 얼굴이 좀만 예쁘거나 해서 잘된 것이어야 내가 그들을 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예술을 논하며 재능을 논하는 이들을 경멸한다.

나는 예술이 조금 더 존경받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차지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시장 경제에 의해서 팔리면 더 팔리는 거고, 안 팔리면 마는 거다. 내가 예술을 한다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거나 존경해야할 하등의 이유도 전혀 없다. 다만 Playwright을 Play-writer 로 바꿔부르며 나도 심심한데 ‘writer’나 해볼까 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아가 치밀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단 하루, 아니 단 한시간도 ‘wright’ 으로서의 연마의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장담할 수 있다. 당신들은 그걸 못 견디기 때문에 결국 못 쓰는 거고, 나는 쭉 견뎌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견뎌내가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다. 날로 먹을 생각 따위나 하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아무데나 천재라는 탈을 씌워서 환호하기는 좋아한다만, 천재는 말했듯 사실 ‘버그’같은 존재다. 한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건 시스템의 ‘버그’ 같은 천재보다는 오히려 ‘위대한 예술가’ 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키워내기도 힘들고, 커나가기도 힘들지만, 이들이 완전해졌을 때는 오래오래 길이길이 그 찬란함을 만방에 떨쳐 공헌하기 때문이다.

 

마광수

돌아가신 마광수 작가. 마광수 작가의 자살 소식은 내게 큰 충격이고 상실감이었다. 그래서 내가 작년에 모두가 돌아가신 마광수 작가의 업적을 찬양하며 거의 노래를 부를 때 거기에 끼지 않았던 건, 살아있을 땐 개뿔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우루루 몰려와 ‘자살한 천재’에 대한 송시를 부르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교수의 말마따나 ‘그가 살아있었을 때 지금의 반만큼만이라도 관심과 지지가 있었다면 그는 자살하지 않았을 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나는 포털 사이트 마다에 마광수 작가가 한국 문학계 유일한 천재 어쩌구로 회자되는 것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짜증이 났다.

마광수 작가가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독보적일 이유는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가 한국 문학계에 영원히 빛나고 마지막까지 빛날 별이면서, 동시에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한국 문학가들을 고고하게 내려다볼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의 진짜 문학적 가치, 그의 인생이 정말 숭고했고, 또 그렇게 기억되고 모두가 기억해야할 이유, 그의 생전 인터뷰 한마디로 말하고자 한다.

 

Q : 후회는 없나?

마광수 : 많지. 마흔한 살에 잡혀들어가 40대 10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변절은 안했다. 다른 글은 몰라도 적어도 소설과 시로는 성을 파고들었다. 너무 중요하잖아요.

(중앙일보 인터뷰)

 

한국인 모두가 터부시하는 주제를 다뤄 뛰어난 성취를 이뤄냈고, 또 억울하게 잡혀가 옥살이를 하고, 동료 지식인과 문학가 대부분이 등을 돌리고 외면해가고, 인생과 명예가 나락으로 떨어졌으면서도 그는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천재가 아닌, 변절하지 않은 묵묵한 기능공이자 끝내 손가락질 받던 연장과 작품세계를 바꾸지 않았던 장인의 삶이었다. 비록 그가 만들어냈던 많은 것들은 당대 그리고 현대의 눈뜬 장님들에게 모욕받았을 지언정, 그의 삶과 문학은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천재라는 모욕을 거두길 바란다. 그는 한국에 몇 없는 진짜 위대한 예술가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