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응원

거창하지 못한 생활

학생 때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스포츠 브랜드, 남성 정장 브랜드 매장에서 판매도 했고, 때로는 가판대에 양말이나 신발, 스팸을 올려놓고 목청껏 장사도 해봤다. 카페 아르바이트처럼 깔끔한 일도 했었지만 공장 집진기나 식당 후드 청소도 했고, 새벽엔 신문 배달, 선거철엔 사무실 철거 작업, 심지어는 석산 발파 현장에서 보조로 일한 적도 있다. (덜 다져진 폭약으로 발사된 바위 조각에 포클레인이 ‘아작’ 나는 걸 보고 당장 그만뒀지만.)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그런대로 어떻게든 밥을 먹고 용돈을 벌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다 보니, 데이터가 쌓여 준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린 수능 국어 강사 일 덕분에 재수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과외도 뛰었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글 쓰는 짓을 놓지 않고 있다가 학생들 자소서 첨삭을 하기도 했다.(의외로 단기간에 돈을 많이 벌었다. 그만큼 일도 많았고.) 지금 이렇게 8F에 칼럼을 쓰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할 수 있었고, 운 좋게 라디오 작가로도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8년, 서른을 맞이하면서, 학원은 그만 뒀고 라디오 다큐도 방영한 후라, 자연스럽게 읽고 쓰는 일만이 유일한 돈벌이가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글밥 한 번 먹어보자 싶어서, 나름 컨셉을 잡고 SNS 페이지도 만들어서 운영 중이고, 조만간 작사 학원에도 가볼 계획이다.

구구절절, 지난 10년의 여정을 엑기스만 뽑아 나열하면 그래도 꽤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그 때, 그 시절을 지나는 동안에는 한없이 초라하고 게을렀던 기억뿐이다. 난 왜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학교 도서관에서 신춘문예나 메이저 문학상 당선 모음집에 실린 나보다 어린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면 자괴감에 잠식당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도, 읽지도 않는 글을 나는 왜 놓질 못하는 걸까. 이렇게 힘들 거면 글이라도 기똥차게 좋아야 예술가적인 면모가 나올 텐데, 그 당시의 내 모습은 그냥 가난하고 철없는 대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글을 쓸 거야. 작가가 될 거야. 하지만 그 시절, 내 생활은 그런 다짐만큼 거창하지 못했다. 다만 얼마라도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자부심인 지금의 내 생활도, 거창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이고.

글을 쓰겠다고 퇴사를 한다.

얼마 전, 그러니까 아직 2017년이었던 12월에 제일 친한 대학 동기가 대뜸 카톡을 보냈다. “경빈아 00 선배가 자기 글 쓰는 거 때문에 궁금한 게 있는데, 니 번호 물어보시길래 알려줬어.” 난 국제통상학부로 입학해서 국문학과로 전과했기 때문에 이전 학과에서 선배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00 선배는 그래도 학부생 때 인사 정도는 주고받은 정도였고, 간간이 SNS 통해 보이는 모습이 멋있는 선배였기 때문에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글 쓰는 거 때문에’ 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딱히 상을 받거나 등단해본 적도 없고, 글밥을 번다고는 하지만 초짜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전혀 거창하지 않은 생활’을 겨우 이어가는 내가 감히 ‘글 쓰는 것’에 대해 선배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됐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나를 기억해줬다는 게 고맙고, 나도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당장 약속을 잡고 늦은 저녁 동네 카페에서 선배를 만났다. 예전의 그 밝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선배는 찬바람에 붉어진 얼굴로 나와 마주 앉았고, 서로의 근황을 더듬더듬 얘기하다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사실 곧 퇴사를 할 생각이거든. 7년이나 다녔고, 연봉도 나쁘지 않은데, 직장 상사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나중에 저렇게 살겠지. 근데 그건 싫어서.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거 한 번 제대로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제대로 글을 좀 쓰고, 책도 내고 해보려고.”

그 얘길 듣고 나서야, 왜 몇 년 만에 만난 이 선배가 여전히 밝고 다정해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7년을 다니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지극히 불안한 꿈을. 때문에 오히려 나는 선배의 그 말 앞에서 “선배, 근데 글 쓰는 거, 글로 밥 벌어먹는 거 쉽지 않아요. 선배 연봉도 괜찮다면서요. 그냥 일하시면서 취미로, 부업으로 해보시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건 거의 몇 분, 몇 시간이지만 선배가 이 겨울에 까마득한 후배인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고민했을 시간은 몇 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게다가 나는 그런 같잖고 오만한 조언을 할 만큼 거창한 인간도 아니었으니까.

그 날은 그렇게 서른 초반과 서른 중반의 남자가 2시간 넘게 꿈에 대한 이야길하다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이 나이에 이르러 먹고 사는 현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가슴 한 구석이 뭉근해지다가도,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자책에 빠지기도 했다. 1월 중순 즈음에 선배는 내게 잘하고 있냐는 안부와 함께, 1월까지만 회사를 다니기로 결정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그저, 선배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충고와 우려의 말들은, 이미 선배가 나를 만나기 전에 충분히 겪었을 테니까.

자기 글을 보여준다는 것

그렇게 다시 거창하지 못한 열흘쯤이 지났고, 이틀 전 저녁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Bro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는 공군 675기 동기이자,(조인성이 공군 675기다.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괜히 말해보고 싶은 사실이다.) 훈련소에서 같은 내무반을 썼던 1살 형이었고, 지독한 괴짜였다. 가장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야 할 훈련병 시절, 1층 내무반 창가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보급받은 보리차를 음미하던 형이었다. (그러다가 창밖의 교관들과 눈을 마주쳤고, 우리 소대는 단체 얼차려를 받았다.) 교관이 관물대나 침구류 정리하는 법을 알려주면, 언제 그런 걸 들었냐는 듯이 제멋대로였다. 하다못해 내무반 빨랫줄에 수건 널어두는 것 하나도 삐딱하게 하던 형이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 형이 좋았고, 그런 형을 마치 동생 챙기듯 챙겼다.)

사실 군대에서 그 정도면 고문관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그 형은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동기들을 죄다 Bro라고 불렀는데, 대부분의 동기들이 그 형을 좋아했다. 늘 유쾌했고, 자질구레한 작당을 모의해서 다 같이 웃을 수 있는 해프닝을 만드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론 당황스러울 만큼 진지했는데, 보급받은 내복의 종이 포장지를 모아다가 거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괴짜였다. 나에게 박민규 소설가의 ‘카스테라’와 진은영 시인을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다. 내 여자 친구에게 군용 숟가락(포크와 숟가락을 합친 형태)을 주제로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글씨가 너무 악필이라 나도, 여자 친구도 놀랐다.)

그리고 6주의 기본 군사 훈련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 다른 특기 학교로, 서로 다른 자대로 배치 받았다. 군 생활 중에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고, 2011년 전역 후엔 부산에서 2번, 간단히 밥을 먹었다. 나는 여전히 이유 없이 형이 좋았고, 형은 훈련소 때 기억 그대로 유쾌했다. 특히 내가 느끼기에 그 형은 특유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예술가적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2년 3개월 만에, 이틀 전 저녁에, 그 형의 전화를 받았다. 예전의 그 말투로,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형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Bro, 있잖아. 내가 이제 글을 쓰려고 퇴사를 했거든. 근데 너는 내가 뭘 하고 싶어 했는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쓴 글이 있는데 혹시 너가 읽어봐 줄 수 있었으면 해서.”

왜 내 주변 사람들을 글을 쓰려고 퇴사를 하는 걸까. 물론 나는 이 형이 ‘입사’를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고 있었지만. 아니, 그보다도 나는 형의 제안이 너무 고마웠다. 우선 형이 제대로 쓴 글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기 글을 보여준다는 건 굉장한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 글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건, 더 큰 의미가 있고. 형은 2편의 단편 소설을 내게 보내줬다. 다음 날, 나는 카페에서 2편을 정독했다. 형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단언컨대 2편 모두 근래에 읽어본 단편 소설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나는 형에게, 등단하거나 출간하기 전에 이렇게 나한테 먼저 파일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친분을 이용한 혜택을 좀 누리자고 했고, 형은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이로써,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읽어보는 독자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2018년 1월엔 생각보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단 한 명의 응원만 있다면

대학생 때, 우리 학과에서 매년 진행했던 주요 행사 중에 ‘작가 초청회’라는 게 있었다. 말 그대로 작가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 행사였는데, 우연히 내가 장률 감독님의 작가 초청회 진행을 맡은 이후로 졸업까지 총 3번의 진행을 도맡았다.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작가님들이 매년 찾아주시지만, 특히 내가 장률 감독님, 김연수 소설가, 강은교 시인, 세 분의 작가 초청회 진행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행운이었다. 00 선배와 훈련소 동기 Bro 형의 일화를 겪으면서, 나는 작가 초청회에서 김연수 소설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더분하게 학교로 찾아온 김연수 소설가는 스스로를 거창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과 기대가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강연이 아니라 자유롭게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당시 진행자인 나를 포함해 작가 초청회를 준비하는 모임인 ‘혜음’ 멤버들은 사전에 김연수 소설가의 대표작이나 정보를 꿰고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처음엔 쑥쓰러운 듯 말을 아끼던 그도, 대화가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자신이 소설이 아니라 시로 먼저 등단했다는 것. 할 말이 많아지면서 시가 아니라 소설로 전향했다는 것. (소설을 쓰는 본인 생각에) 시인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평소 아주 치열하게 글만 읽고 쓰지는 않고, 여러 경험들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따로 작업실이 있는데, 글이 잘 써질 때는 그 작업실에서 해가 지고 뜨는지도 모르고 글을 쓰지만, 안 써질 때는 작업실에 얼굴 도장만 찍고 술 마실 때도 많다는 것, 등등…

그렇게 혜음 멤버들의 적극적인 질의응답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혜음이 아닌 국문학과 후배가 손을 들었다. 나는 그 후배에게 마이크를 전달하도록 했고, 후배는 짧은 한숨을 쉬고 차분히 말했다. “글이 좋아서 국문학과에 왔습니다. 어른들이 거기 가면 굶어죽는다고 말렸는데도, 그냥 좋아서 왔는데요. 그래서 작가님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면 글을 써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요.”

사실 후배의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호소에 가까웠다. 질문이라기엔 너무 ‘우문’이었으니까. 아마 불안했던 거겠지. 그리고 그런 종류의 불안은, 우리 학과 학생들 모두가 느끼는 공통의 감각이었다. 때문에 나도 김연수 소설가의 대답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작가 초청회 내내 그가 했던 말들만 보면, 허세를 떨거나 위선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곤란한 미소를 살짝 짓고 나서, 솔직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억을 토대로 구성하면 대충 이런 대답이었다.

“글이 좋아서 국문학과에 왔다고 했지요? 하지만 동시에 국문학과에 오면, 글을 쓰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구요. 글로 밥 벌어먹기 힘듭니다. 정말 뛰어난, 저보다 좋은 작품을 쓰는 분들도 다들 투잡, 쓰리잡 하시는 분들 많구요. 그런데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돼요. 전업 소설가, 전업 작가 아니면 실패한 걸까요? 투잡, 쓰리잡 뛰면서 글 쓰는 작가들은 불행하기만 할까요?

어떤 일이든 그렇겠지만 꿈을 쫓는다는 건요, 괴롭고 힘들고 외롭고, 그런데도 대책 없이 행복한 일이에요. 문제는 이 현실이라는 벽 때문에, 사회적인 시선이나 평가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할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서 전업 작가가 될 수도 있고, 투잡, 쓰리잡 뛰면서 작가로도 창작 활동 할 수 있는 거죠. 어느 쪽이든 꿈을 쫓으면서, 이루면서 사는 건 똑같습니다.

리고,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나가려면요, 혼자서만은 힘듭니다. 주위에서 계속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곁에 두면 좋아요. 많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딱, 한 명만 있어도, 그 한 명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요.”

잊고 지내던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나는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불안해하면서도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내게는 적어도 10명은 있었다. 10명이라니, 나는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포기한다면, 그건 오롯이 내 탓인 거였다. 퇴사를 감행하고 글을 쓰겠다며, 그 많은 지인들 중에 굳이 내게 연락을 준 00 선배와 자기 글을 읽어달라며 보내준 Bro 형. 그들에게 나는 몇 번째 응원을 더하는 사람이었을까. 참 다행스러운 것은 만약 내가 첫 번째였든, 마지막이었든, 적어도 나는 그들에게 ‘단 한 명의 응원’이 되었을 거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