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

‘하면 된다.’ 무슨 신조 같기도 하고, 그냥 툭 내뱉는 말 같기도 한 이 문장은 생명력이 강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허약한 아들의 도전 정신을 부추기는 단골 멘트였고, 합기도 체육관 관장님께서 백 텀블링을 가르칠 때 목에 힘주어 외치던 기합이었다. 그런가 하면, 전후 황폐한 국가의 경제를 기적적으로 일으켰던 산업 현장의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구호이기도 했고, 몇몇 소수의 자수성가에 성공한 이들의 자서전에 빠지지 않는 덕목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소위 ‘노오오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말이 이토록 오래, 통용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아주 단순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이지 않고, 단순하고 일반적인 문장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어떤 상황에나 걸칠 수 있는 범용성이 있다. 게다가 억양은 또 얼마나 담백한지. ‘해보긴 해봤어?’처럼 비꼬는 말투도 아니고 ‘하면 무조건 된다!’처럼 밀어붙이며 단정 짓는 강경한 말투도 아니다. 그냥 어떤 사실을 서술하듯이, 담백하게 툭 내뱉는다. ‘하면 된다.’ 한마디로, 의미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거부감이 덜한 문장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말을 반 정도만 신뢰한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처럼, 어떤 일이든 해보지 않고서 섣불리 체념하고 포기하는 일은 보통 후회와 미련으로 남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시작한다고 해서 꼭 ‘된다’ 거나 ‘되어야 한다’는 식의 태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하기는 했는데, 그 무엇인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이란, 투입과 산출 과정이 성공적이지 못하면 폐기 처분되는 기계와 달리, 실패에서도 충분히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나는 ‘하면 된다.’에서 ‘하면,‘ 까지만 신뢰한다. ’된다.‘는 엄밀히 말해 ’될 수도 있다.‘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얘기 아니냐고? 아니, 결정론의 고전역학에 맞서서 세계가 확률로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단지 지금 ‘했다.’는 이유로 ‘된다.’고 단정 짓는 것이 더 무모한 객기 아닐까.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런 점에서,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내가 경멸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명령문의 오만하고 강경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어떤 일에 도전했는데 일이 잘 안 풀렸다면 ‘왜 안 됐는지’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도록 하는 게 순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되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안 되던 것을 되게 할 수도 있지만,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이제 더 이상 그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그로부터 배울 점을 취하고 깔끔하게 포기한 뒤, 다른 일에 도전하는 편이 현명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의 통용되는 진의는 ‘될 때까지 노력하고, 기어코 해내라.’ 정도이지만, 내가 경멸하는 이 말의 저의는 ‘그러니까 안 되면, 다 네 탓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폐업했지만, 불과 4년쯤 전까지 영업했던 김해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빌딩의 한 대게 전문점은 늘 커다란 옥외 전광판에 이런 글씨를 내보였다. ‘안 되면 대게 하라!!!’ 여자 친구 본가 근처이기도 했고, 경전철 역 바로 앞이기도 해서 잊을만 하면 늘 보였던 그 문장. 볼 때마다 그 유치함에 코웃음을 치곤했던 그 문장. 하지만 내게는 적어도 ‘안 되면 되게 하라.’보다는 ‘안 되면 대게 하라!!!’가 훨씬 멋진 문장이었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야심차게 도전했던 일에 실패해서 슬플 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싱싱하고 맛있는 대게나 먹어보자는 거. 차라리 그게 훨씬 더 인간적이고 행복한 방법 같아서.

성실은 촌스러워

‘노오오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고깝게 듣기는 하지만, 사실 진짜 노력해야할 일에 게을렀던 것도 사실이라서 좀 열심히, 성실히 살아볼랬더니 요즘엔 또 이런 말이 돌더라. ‘성실이 미덕인 시대는 끝났다.’, ‘성실은 촌스럽다.’ 물론 그 말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공이산’ 식의 우둔하고 우직한 성실이 아니라, 트렌드를 읽고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융합적 지식을 기반으로 효율적인 성실이 필요하다는 것이긴 하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밀려들던 허무함이란. “아, 뭐, 어쩌라고요!?”하는 푸념을 툭, 하고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런데 ‘트렌드를 읽는 것’, ‘융합적 지식의 토대를 쌓는 것’ 뭐 이런 건 게을러도 할 수 있는 건가? 그런 노력도 다 ‘성실’의 일부 아닌가? ‘호모 루덴스’를 역설하면서 ‘놀이 하는 인간’을 얘기하지만 놀이에 푹 빠져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아니 자기 스스로도 잊는 망아(忘我)의 순간을 누리도록 언제 이 사회가 허락이나 해줬던가? 청소년 때 귀에 딱지 앉게 들었던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해야지.”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노는 건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할 때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성실하라고 부추겨놓고, 이제 와 성실은 미덕이 아니라고? 촌스럽다고? 유행 따라 ‘그런가보다’하고 물 흐르듯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적어도 위선적이지 않기 위한 성찰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 삶에, 우리의 생활에 어떤 일들은 성실이 아니고는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 성실은 전혀 촌스럽지 않다.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길래

글을 다 적고 나니 세상에 이런 사회 부적응자가 또 없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인정 못하겠고. 그런데, 사회에서 하란 대로 순종적으로 살아볼랬더니 자꾸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았다. 그냥, 말만 많았다. 절대적인 진리치를 가진 것 같던 문장들도 현실에 끌고 와보면, 늘 허점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아무튼, 지금의 내 상황은 이렇다.

– ‘하면 된다.’에서 ‘하면’만을 취한다.
   될 지 안 될 지는 추후에 확인해보는 걸로.

– ‘안 되면 되게 하라.’에서 ‘안 되면’만을 취한다.
  그 이후엔 안 된 이유를 분석해서, 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될 것 같으면 과감히 포기.
단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새기도록.

– ‘성실은 촌스럽다’에서 ‘성실은’만을 취한다.
   ‘성실은 전혀 촌스럽지 않다.’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