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률을 논하다.

스포츠는 승률의 게임이다. 많은 스포츠 도박사들은 이 승률을 근거해 자신의 돈을 건다. 승률은 미래를 계산해내는 수학적 공식이라기 보다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환산하는 방식이다. 과거는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미래를 예측한다. 하지만 인간이 이루어내는 스포츠 역사의 대부분 이런 방식을 파괴했을 때, 이른바 레전드가 탄생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이 4강에 들어갈 승률은 얼마나 되었을까.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타이틀, 홈그라운드라는 이점 외에는 포루투갈,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축구에 미친 나라들을 깨부수리라는 아무런 희망도 근거도 없었다. 4강에 안착했을 때, 우리는 승률이 아니라 그들의 투지와 투혼에 더 큰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희망도 없던 승률에서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

많은 이들이 환호했고 용기를 얻었다. 스포츠가 주는 그 카타르시스는 바로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했다. 98년 IMF로 인한 전국민의 패배감이 박찬호, 박세리에 이어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적인 성과로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월드컵 특수라는 말이 단순히 월드컵으로 인한 잠시의 경제적 부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노력과 열정을 뛰어넘어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바라보며, 우리는 반성하고 다짐한다. 그래서 어쩌면 스포츠는 가장 원시적인 종교, 경전이자 성경이다.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옆의 똑같은 인간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적 동화다.

누구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인 어떤 것이 되었든, 육체적인 어떤 것이든 자신이 느끼는 ‘승률’ 이라는 것을 뒤집어 넘은 사람만은 안다. 그 순간이 주는 인생의 교훈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큰지를. 그리고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간절했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며 흐뭇해한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친구들과 등산을 갔다가, 길 잃은 친구들의 조난신고를 위해 산을 뛰어내려 왔던 적이 있다. 국립공원의 꽤나 높은 산이었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 친구들이 사라졌다. 올라오는데만 4시간이 넘게 걸렸던 산이었다. 그런데 내려와 조난 신고를 하고 시계를 확인해보니 채 4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때가 중3이었다. 당시 나는 산을 그렇게 잘 타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많이 간절했다. 나는 이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아는 지인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3년을 공부했다. 공무원 지향사회가 다소 불만스럽지만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녀 나름대로의 꿈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꿈을 열렬히 응원했다. 1년과 2년차, 연달아 낙방했을 때, 주제넘은 생각에, 현실을 운운하며 그녀를 다시 사회로 돌려 세울 조언을 해주고도 싶었다. 공무원 공부를 지속할만한 현실적인 환경과 조건 자체가 받혀주지도 않던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이 되던 해, 그녀는 당당히 합격했다.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서 결국 해냈다. 그리고 합격턱을 쏘던 날, 장애인 전형이라도 치고 싶어 손가락이라도 자를까 고민할만큼 간절했다던 그의 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하다. 공무원 시험의 장애인 전형은 일반전형보다 합격선이 낮은 편이다. 물론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나는 이것이 꼼수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간절함을 보았다.

소치올림픽에서 편파판정으로 김연아 선수가 가져가야 할 금메달이 소트니코바에게 갔을 때, 김연아 선수는 이런 인터뷰를 했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금메달을 줬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김연아 선수의 쿨함과 동시에 어쩌면 저것이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잘못된 방법이긴 했지만, 가끔 그 간절함은 승률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리우올림픽 박상영 선수가 랭킹 4위의 임레 게자 선수를 이긴 것도, ‘할 수 있다’ 고 수없이 되새긴 간절함 때문이었다.

이세돌 선수와 알파고의 바둑대결에서는 인간의 간절함과 의지가 승률이라는 체계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는 지를 수학적으로 잘 보여준 사례다. 4국에서 알파고는 전처럼, 승률이 50%를 넘었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이 78수에서 묘수를 두었을 때, 알파고의 승률은 처음으로 50% 이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계속 무리수를 두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세돌은 보이지도 않는 승률에 연연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승률이라는 것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파고는 처음으로 50% 이하의 승률에 기계적인 연산이 더뎌졌다. 바로 포기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기계문명을 찬양하지만, 기계처럼 살지 않는다. 1%의 가능성을 놓고도 그 끝을 본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기적적인 결과를 낳는다.

테니스 변방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정현이라는 한 선수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조코비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을 제외한 세계 그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정현의 승률이 조코비치 보다 높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 조차도, 현실과 희망을 달리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승률에 굴복하지 않았다. 스크린을 통해서 본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드라마겠지만, 그 주인공들은 그것이 일상이고, 현실이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삶의 승률이 50%를 넘을 지 말지에 너무 연연하며 살아간다. 50이라는 숫자를 절대적인 기준치로 두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짖는다. 너무 기계처럼 살진 말자. 그러기엔 우리의 체온이 너무나 아깝다. 우린 이미 36.5% 라는 생명의 승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