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첫 체벌

내 인생은 늘 그래왔다. 난 항상 몰라서 실수를 많이 했고, 보통 그 실수는 씻을 수 없는 실수가 많아서 돌이킬 수가 없었고, 그래서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아버지한테 처음 체벌을 받았는데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모든 건 기억과 메모에 의지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가족끼리 어딘가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난 학교가 끝나고 집에 1시간 안에 귀가해야 했다. 시간이 참 애매하게 떠서 친구들과 어디 놀러가기도 그랬는데 한 친구가 극구 자기 집에서 잠깐 놀고 가자며 붙잡았다. 어렸을 때는 친구가 인생의 전부인 것만 같았고, 어렸을때의 나는 정말로 정말로 거절을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 뭐, 놀자.

나는 친구 집에 갔고 놀다보니 집에 1시간 안에 가야한단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집에 나를 초대한 친구도 ‘너 1시간 뒤에 집에 가야한다지 않았어?’ 같은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잊어버렸었나보다. 어릴때는 다 그러니까.

집에 왔더니 부모님과 누나까지 전부 양복에 좋은 옷을 차려입고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아차 싶었다. 까먹었으니까. 뭐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아무튼 그날 그렇게 해서 처음 아버지한테 체벌을 받았다. 확실히,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난 그때 이후로 아버지를 좋아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물론 지금도. 별 일은 아니다. 다 그렇게 사는거니까. 다만 좀 아쉬운 것은 그 경험 이전에 나는 아버지를 꽤 좋아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좀 씁쓸하지만 사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첫 추락

난 어릴때부터 뭔가에 영재성을 보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인생에서 뭐든지간에 거저 먹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한글을 유치원 졸업하던 날 선생님이 붙들고 가르쳐줘서 하루만에 떼긴 했지만 한글 그정도에 못 떼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그리고 설사 한글 좀 늦게 뗀다고 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피아노도 태권도도, 다른 운동이나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뭔가를 습득하고 배우는 속도는 아주 빠른데, 어느 단계에 이르면 고착되는 시기가 찾아왔고, 이 고착된 시기를 넘어서기를 매우 힘들어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뭔가를 배워나가니까 처음엔 재미있는데, 어느순간이 되면 나는 실력이 늘지 않고 뒤쳐졌던 다른 아이들이 나를 앞서나가는 걸 보는 광경은, 그렇게 썩 유쾌하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뭔가 통찰력을 얻기에 나는 그냥 어린애일 뿐이었다. 생각해보기에 나는 27살 까지도 거의 어린애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니 아동기 때는 더 했다.

이런 성향상 뭐든지간에 본질적인 재미를 느껴서 꾸준히 그냥 숨쉬듯이 묵묵히 해나갈만한 걸 선호했다. 배우면서 뒤처지는 것도 재미없지만, 무언가를 하다가 관두는 건 더 자존심이 상하고 짜증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나, 속셈학원이나, 영어학원이나, 태권도나… 사실 뭐 하나 썩 내 맘에 드는 그런 학원은 없었다. 난 학원에 가는 걸 정말 안좋아했는데 역시나 뭐든지간에 하다가 뒤처지는 건 기본이고 본질적인 재미같은건 느끼지도 못했었으니.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에 보냈다. 남들에 비해서는 많이 보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역시 평범한 대한민국의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라났고,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였다. 난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거의 학원을 2개씩 다녔고, 그건 중학교 1학년때까지 이어졌다.

중학교 2학년이 돼서 사춘기가 찾아왔는데 문득 다 모든 게 지겨워졌다. 난 부모님에게 다니는 모든 학원을 전부 관두겠다고 말했다. 사실 학원에서 크게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도 잘 안하던 때였고, 학교에서는 배우는 게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를 엄청 잘해서 전교 1,2등권에서 노는 아이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상위 30%에서 떨어져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아마 유지가 되겠거니 하고 학원을 다 끊어주었다.

그리고 그게 내 유년기의 가장 길고 긴 우울함의 시작이었다.

성적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는데 상위 30%에서 놀던 성적은 단계별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번지점프하듯 한번에 하위 90%로 떨어졌다. 나조차도 희한할 노릇이었던게 그전까지 공부를 안하던 것도 아닌데 정말 그렇게 됐었다. 학교에서는 배울 게 전혀 없다고 생각하던 버릇이 들어버렸는데, 그렇다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던 것마저 끊어버렸고, 그런데다 혼자 공부하는 법은 전혀 몰랐으니 벌어진 참사였다. 부모님도 처음엔 설마설마했는데 나중엔 분노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버지의 분노는 심해서 성적표가 날라오는 날이면 거의 매번 두들겨 맞았다. 초등학교때 맞은것도 충격이 심하긴 했지만 이때 맞은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도망

그래서 난 도피처가 필요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도피처. 떨어진 성적에서 압박받는 걸 벗어날 도피처. 거기에 따라 떨어진 자존심이나 우울함도 뭔가 회복할 것이 필요했다. 난 운동을 선택했고 그렇게 중학교 2학년때부터 유도를 시작했다.

유도는 재밌었다. 뭔가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 먼저 요청해서 배우기 시작한 것도, 유도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유도는 재밌었고, 빨리 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고착된 시기가 찾아와도 별 생각 없이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왜냐면 고착된 시기든 고착되지 않은 시기든 결국 배우는 과정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매일 같은 훈련을 했고 같은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할 때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이 행복한 것만은 또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는, 그게 제일 중요했었다.

나중에 군대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쓴 <보디빌딩 백과> 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 나오는 말 중에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

“보디빌딩처럼 실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없다. 당신이 벤치에 누워 바벨을 들어올릴 때, 거기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들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깔려 죽을 것인가?”

내게 유도는 그저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서 해낼것인가? 말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만 택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건 다른 것들에 비해서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유년기의 내게는 오지선다도 너무 많은 선택지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난 상황을 벗어나고 도피할 단순한 게 필요했었고, 운동은 그걸 줬다.

내겐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좋고, 싫고도 없고, 괴롭고, 행복하고도 없는, 그냥 완전한 몰입의 순간들.

 

망치질을 할 때는 그저 묵묵하게

고등학교 2학년 때 피치못할 이유로 아버지와는 잠시 떨어져 살게됐고, 난 학교에서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어처구니 없게도 친구의 몸에 팔이 깔려서 팔이 부러졌다. 재활에는 1년이 걸렸는데 집안 사정상 체대입시로 다시 재수를 준비할 여유같은 건 없었고, 난 그냥 팔에 깁스를 한 채로 다시 교과서나 보면서 고3 1년을 보냈다.

여전히 공부하는 법은 모르는 채였기에, 그냥 무작정 교과서를 많이 보기만 봤었다. 그래서 언어 영역이나 사회탐구 영역같은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진도를 꽤 많이 따라잡았지만, 수학이나 과학처럼 뭔가 앞의 계단을 밟지 않고는 다음 계단의 존재 유무도 알 수 없는 과목들은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아주 안좋은 지방대의 별볼일 없는 학과에 갔고 Blah blah blah… 인생은 흘러갔다.

인생에 큰 반전같은건 전혀 없었다. 성장? 그딴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27살까지도 거의 어린애인 채로 살았던 것만 같다. 지금도 사실 내가 어린애가 아닌지는 전혀 모르겠다.

다만 예전보다 삶을 혼란스럽게 살아내지는 않는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나는 웬만한 모든 분야에서 삶의 선택지를 2개로 줄여버렸다. 해낼지, 말지. 그렇다고 후자의 선택이 늘 나쁜 것도 아니었다. 몇 년전에 정말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건 정말 최근 선택중에서 가장 잘했던 선택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수도 계속 했다. 불과 어제도 했고, 엊그제도 했으며, 그 전날에도 했다. 실수를 하고 괴로워하고, 돌이키거나 주워담을 수 없어서 고통받는 걸 반복하고 있다. 다만 실수한 뒤에는 묵묵히 그걸 수습하려고만 노력했다. 별다른 가치판단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좋고 싫고도 없이, 괴롭지만 그래도 몰입해서 뭔가 부서진 외양간을 고치려고 했다. 외양간을 고치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든 욕을 하든 가끔 똥물이 튀건간에, 그래도 외양간은 고쳐야 했기에, 나는 그저 망치를 들고 못질이나 해대며 살았다. 외양간을 고칠 때는 보통 전자의 선택을 했다. 망치질을 할 때는 그저 묵묵하게 하는 게 최선이더라.

한국에서는 보통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애초에 그 속담 자체가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강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 경멸을 경멸하라. 그들은 결국 소 잃은 사람에 대한 경멸을 통해 욕이나 하면서 자기 만족을 하고싶어할 뿐이다. 그건 집나간 소가 돌아오게 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고, 그렇다고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쳐주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려주지도 않으며, 잃어버린 소주인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묵묵하게 외양간이나 고치고 나면 다음부터는 더 강해지기라도 한다. 소를 잃었으면 그냥 외양간을 고치자. 그냥 그렇게 살자. 나도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