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기억 너머의 음식

하루의 시차는 산 자의 음식과 죽은 자의 음식을 가로질렀다. 나는 주어진 한 해를 한번 더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고, 할머니는 더는 기약 없는 영원한 길을 떠났다. 언젠가 아내가 말했다. 세상의 모든 만남에서 ‘언제’ 떠날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이 그 존재에 대한 행복을 더 크게 만든다고. 생각해보면 그랬다. 3일 뒤에는 떠나야 한다는 약속이 여행을 더 즐겁게 만들고, 이틀 정도만 신세를 지겠다는 친구의 방문이 반가운 것도 그 약속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약 두 달 전, 결혼하기 한 달 전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 계셨다. 주치의와 레지던트쯤으로 되어 보이는 의사 두 명은 관공서의 무기력한 공무원 같은 표정과 말투로 죽음에 대한 대비를 아무렇지 않게 알렸다. 엄마는 의식 없는 할머니의 귓가에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애들 결혼식 잘 치를 수 있게 도와주이소.”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무사히 결혼을 치를 수 있었다. 엄마의 간곡한 부탁과 온 가족들의 기도 덕분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의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나와 내 아내는 결혼한 바로 다음 날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러 갔다. 그리고 때마침 의식이 돌아오신 할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애들한테 제일 큰 부조했십니더. 고맙십니더.”

아버지는 새 애기가 된 내 아내를 할머니에게 소개했다. 할머니는 고양이처럼 눈만 끔벅거리며 힘겹게 아내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선 간신히 간신히 힘겹게 말씀하셨다.

“이쁘다. 잘 살아래이.”

의식이 돌아온 가운데서도, 가족들은 할머니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긴 했으나 올해는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말을 할머니의 기약으로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의사를 대리인 삼아 올해 안으로는 돌아 갈거라고, 올해 안으로는 떠날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가족들에게 슬픔만 남아있진 않았다.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모를 기약 없는 기약에 온 가족이 사랑을 말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자식으로서, 손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리를 다해 당신 곁을 지켰다. ‘사랑해’ 라는 표현이 쑥스러워 마지 않던, 환갑이 넘은 아버지와 고모들이 할머니에게 그들의 오랜 마음을 표현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도, 죽음을 대비하는 사람도 행복했을 것이다. 다 커버린 자식들에게 평생토록 듣기 힘들었던 말들을 침상 위에서 나마 들으셨으니 할머니는 분명 행복하셨을 것이다. ‘진작에’ 라는 후회보다 ‘그래도’ 라는 감사함으로 배웅할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나갔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 주말 오전 쯤, 할머니는 떠나셨다. 집에 놀러 왔다가 떠나는 친구처럼, 혹은 ‘가족’ 이라는 지도에 배낭여행을 왔다가 훌쩍 떠나 버린 여행자처럼 그렇게 떠나셨다. 우리 가족의 한 세대를 책임지던 엄마이자, 여자, 할머니, 그 이전에 우리 가족 안에서만큼은 위대했던 한 인간의 죽음을 알리는 내 엄마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아쉬움이 섞여 있었지만 한스러움은 없었다. 아내에게 소식을 전하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뵀던 할머니의 모습과 ‘잘 살아라’는 당부를 떠올렸다. 잘 차려진 음식들과 화려하게 치장된 국화들 사이에 머리만 새하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사진 속에서 아기처럼 웃고 있었다. 가족들은 사진이 참 좋다며 오히려 그로부터 위로받았다.

장례식장에선 뿔뿔이 흩어져있던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바다처럼 모인다. 각자가 가진 기억의 지류가 흘러 흘러 한  사람에 대한 인격의 섬을 만들고, 그 기억을 풀어내는 언어들이 등대의 불빛처럼 그 영혼을 비춘다. 좋은 기억과 영혼의 무게는 반비례하므로, 그는 더욱 더 가볍게 떠날 수 있다. 좋은 기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이나 자신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가끔 휘청 거렸지만, 할머니는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민들레 씨앗만큼이나 그 영혼의 무게가 가벼운 듯했다. 지금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은 삼일장이라는 산 자들의 형식화된 절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 와중에, 고모는 할머니와 얽힌 ‘짬뽕’ 이야기를 꺼냈다. 언젠가 할머니께 짬뽕을 사드렸더니 ‘세상에 이런 맛있는 국수가 다 있느냐’ 시며 맛있게 드셨다 한다. 다들 비슷한 경험과 감정이 있었던지 집안 어른들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짬뽕, 짜장면 한번 제대로 사드리지 못한 회한이 웃음이 되고, 에피소드가 되었다.

자형(姉兄)은 평소 할머니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기억을 말했다. 자형이 누나와 사귀고 있을 때다. 그때는 결혼 얘기도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는데,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다. 할머니께서는 훗날 손주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자형을 위해, 부엌에서 무언가 뚝딱뚝딱하셨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가 소주 열댓 병을 사골을 끓이는 큰 찜통에다가 콸콸 쏟아붓고는, 들기도 힘든 그것을 얼쯤얼쯤 들고 오셨다. 그리고 그 찜통을 술상 옆에 탁하고 놓으시더니 대뜸 말씀하셨다.

“내가 먼저 안 마시면 자네도 안 먹을 테니, 나부터 한 잔 주게.”

그리고 곧장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고 한다. 사촌 동생은 ‘할머니 걸크러쉬 쩐다’ 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장례식장에서 큰 웃음소리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그것마저도 다 받아주셨다. 그리고 나 역시도 사연 하나를 더 보탰는데, 그것은 계란후라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특별하진 않지만, 계란후라이만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고, 내가 꼬마일 때 할머니집에서 먹었던 투박한 계란후라이가 그렇게도 기억이 난다고. 전형적인 시골 분이시라 할머니의 음식은 세련되지 못했음에도 참 따뜻했다고.

할머니의 마지막 밥상은 따뜻했을까, 다 식어 빠진 형식적인 제사상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딱했다. 음식마다 제 온도가 다 다르듯, 그 음식을 바라보는 기억의 온도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춥고, 어떤 것은 따뜻하다. 후회로 가득한 음식에서 뚝뚝 떨어지는 기억의 물기는 차디찬 고드름이 되어 가슴을 찌를 때도 있다. 한편으로 아궁이에서 피어난 따뜻한 열기처럼 그 온도가 뭉근하게 전해질 때도 있다. 어쩌면 할머니의 짬뽕이 그러했을 것이고, 술통과 계란후라이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날 우리가 먹고 있던 장례식장 음식은 따뜻했고, 할머니의 마지막 상은 차가웠다.

할머니의 발인이 끝나고, 가족 친지들은 헤어졌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삼일간의 기약으로 인해, 우리의 만남은 반가웠고 추억은 더 커졌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늘 우리를 당황케 하지만,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려했다. ‘나 가겠노라’ 선언하신 적은 없지만, 당신께 남아있던 모든 기력을 소진하며 몸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마치 다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그 빛꺼짐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고, 다행히 우리는 크게 황망하진 않았다.

단 하루의 찰나로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밥상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밥상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장례식이 모두 끝난 다음 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의 생일상은 따뜻했다. 엄마가 차려준 생일상에 더해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까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을 선물 받았다. 사람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음식은 오직 단 하나의 음식이다. 설령 똑같은 레시피로, 똑같은 장소에서 먹는다고 한들 그것은 그때의 음식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계란후라이더라도, 그 기억 속의 음식은 꼭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만 같다. 올해의 끄트머리에서 듣고 바라본 기억의 밥상들도 그러할 것이다. 맛과 행복은 비례하지만, 한 사람과의 추억이 깃든 음식에는 그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의 풍미 따위와는 상관없이,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 저 마다에 고유명사를 붙이는 일은 이별에 맞닿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반추다. 혀끝이 기억하는 맛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기억하는 맛일테니, 그래서 우리는 그 추억들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