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이.
  정말 이렇게까지 추워도 되나 싶다.
  러시아 모스크바보다, 북극의 아이슬란드보다, 서울 기온이 낮단다. 뉴스만 봤다면 믿기지 않았을 텐데, 밖에 나가니 단박에 이해가 된다. 살을 에는 바람에 얼굴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러시아에 가보진 못했어도 하여간 이것보단 무조건 따뜻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따뜻한 패딩을 입고도 추위에 못이겨 벌벌 떨어야 한다면 사실상 이것은 불가항력의 날씨다. 그러니까 부러 맞서지 말고 따뜻한 방안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말자. 자고로 겨울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귤을 까먹는 것이 진리지. 그럼그럼.
  그런데 틀어 박히고 싶을수록 일정은 왜이리 많은 것일까. 연말이라고 일과 약속들이 잔뜩 몰려있어서 내일도 모레도 외출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피하는 것 말고 다른 대책을 찾아야한다.
  ‘내복이다. 내일부터는 내복이다.’
  그렇다. 계절은 바야흐로 내복의 시기에 이르른 것이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1년간 묵혀둔 내복을 꺼내며 안도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안도감은 당연히 앞으로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요, 불안감이 오는 건 사실 내가 내복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복을 싫어하게 된 최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건 아마 초등학교 때일 것이다. 어느 추운날 어머니께서 내게 입으라고 강요한 붉으죽죽한 내복이 얼마나 못생겼던지, 나는 절대로 그걸 입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어머니는 속에 입는 건데 누가 보냐고 당장 입으라고 소리치셨고 한참의 씨름 끝에 결국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내복을 입었다. 팅팅 부은 얼굴로 ‘못생긴 내복’을 입고 등교하면서, 누가 볼 수 있든 말든 그 내복이 나랑 함께 있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하루종일 서러웠다.
  그 강렬한 기억 때문에 나는 ‘내복’이라고만 해도 거부반응을 보이며 “난 내복 싫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아무리 추워도 내복만큼은 입지 않으며 버틴 십몇년의 세월이 있었다. 미련스러운 고집임을 알면서도 내복이란 날 괴롭히러 오는 못난이인것만 같았다. 발열내의가 한창 붐일 때도 혼자서 꿋꿋이 내복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몇 년 전 태백으로 겨울산행을 가면서 처음으로 발열내복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신세계를 만났다.
  두꺼운 옷은 겹쳐 입는데 한계가 있다. 아무리 패딩이 따뜻해도 패딩 위에 패딩을 입기는 힘들고, 우선 두꺼워질때마다 움직임이 둔해져서 곰처럼 불편해지는데다, 따뜻한 곳에 들어갔을때 부피가 큰 옷을 처리하는 게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무작정 겉옷을 추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내복이란 것은 얇게 생겨가지고선 왜 이토록 따뜻하고 훈기가 도는 것인가. 움직이기도 편한데 전체적으로 몸 자체가 겨울에서 가을로 타임슬립을 하는 기분이었다.
  “내복 너무 따뜻해… 몸에 장벽 두른 것 같아.”
  기나긴 싸움에 패배를 인정한 나의 이 말과 함께, 내복은 마치 제2의 내 피부인 마냥 겨울마다 들러붙어서 같이 살아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못생긴 내복을 입고 울던 날도 실은 엄마 말씀대로 따뜻하긴 분명 따뜻했다. 거부감으로 가득한데 그 와중에 몸은 포근한 온기가 도니까 더 서러웠던 것이다. 그때는 그 온기가 굴욕적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고맙다. 이열치열에 이냉치냉은 무슨, 역시 겨울엔 뜨뜻한 게 최고였다.
  지금은 내복을 종류별로 색깔별로 사모으는데 디자인도 점점 더 예뻐지고 기능성도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반가운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난 위 아래로 내복을 입고 있다. 정말 따뜻하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강해서 아직도 ‘내복’이란 존재에 막연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매 겨울마다 내복을 꺼낼 땐 초등학교 시절의 서러운 기억이 떠올라 잠깐 망설이지만 결국엔 내복 없인 겨울을 보내지 못한다. 우리 모두 이 따뜻함에 눈을 뜰 필요가 있다.
  체온이 1도 내려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이상 감소한다고 한다. 춥고 병까지 든다면 그건 얼마나 서러운 일일까. 더욱이 오늘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3도인데 심지어 바람까지 분다고 하니, 내복 중에서도 제일 성능 좋은 발열내의로 골라 입고 나가야겠다. 그래, 괜한 오기로 버틸 때가 아니다. 지금 세상은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막강한 차가움 속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