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값

브랜드 대신 연예인?

최소 반 년 전부터,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봐온 바이럴 광고 영상이 있다. ‘블랙 몬스터’ 라는 남성 그루밍 브랜드인데, 적어도 내 기억에 그 시작은 일명 ‘셀프 다운 펌’이라는 헤어 제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군 전역 후 거의 7년 동안 ‘투 블록’ 스타일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사용해볼 일이 없었지만, 광고 영상대로라면 분명 획기적인 제품이기는 했다. 매번 미용실에 들러 다운 펌을 해야 했던 남성들에겐 그 시간이나 비용을 절반, 아니 그 이상으로 줄일 수 있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다양한 업체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올리브영’ 이나 ‘왓슨스’ 같은 드러그 스토어에서 간단히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뭐, 어찌 되었든 나와는 무관한 제품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살다가 최근 ‘배정남 다운 펌’ 이라는 표현이 보이길래 ‘다운 펌 부흥기 다 지나서 또 웬 배정남 다운 펌?’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몇 개월 전 처음 봤던 바로 그 ‘블랙 몬스터’의 동일한 다운 펌 제품이었다. 어떻게 섭외를 했는지, 우리가 아는 그 배정남이 바이럴 광고 영상을 찍었고, 그 이후로 제품 이름은 유명무실해지고 ‘배정남 다운 펌’으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브랜딩 측면에서 과연 장기적으로 현명한 처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꺼져가던 셀프 다운 펌 시장에 잠시 활기를 불어넣기는 한 듯했다. 일반인들의 사용 후기 영상만 난무하던 바이럴 광고 영상 판에 처음으로 연예인이 등장했으니까.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도 ‘배정남’ 이라는 이름은 잊혀지지 않았는데, ‘블랙 몬스터’ 라는 본래 브랜드가 떠오르지 않아 검색해봐야 했다.

연예인 프리미엄, 어디까지?

사실 ‘배정남 다운 펌’ 정도의 연예인 효과, 연예인 프리미엄은 약소한 축에 든다. ‘커피는 맥심 – 안성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카누 – 공유’, ‘유니클로 히트텍 – 이나영’ 등등 특정 브랜드나 제품을 떠올릴 때, 연예인 자체가 브랜드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경우는 많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 버프’ 를 받아 유명세를 탄 제품들도 있다. 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입고 나온 트레이닝복은 디자인이나 소재, 가격 등 어느 모로 보나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아이유 트레이닝복’ 으로 유명해져 10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고현정이 피부 수분관리를 위해 비행기에서 한 통을 다 쓴다고 말한 뒤 일명 ‘고현정 크림’으로 유명해진 ‘산타마리아 노벨라’는 당시 국내 입점도 되기 전이었지만 수많은 직구 행렬을 이끌었다. 고현정이 해당 브랜드의 국내 입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니냐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이니, 연예인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드라마 속 연예인의 협찬 제품, 공항 패션 등이 브랜드 홍보 및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특히 이런 연예인 프리미엄이 가장 큰 스케일로 적용되는 분야는 바로 부동산이다. 누구누구네 빌딩, 누구누구네 아파트 등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부동산은 대부분 투자에 성공한 부동산인 경우가 많다. 부동산 가격에 미치는 조건은 워낙 다양해서, 그저 어떤 연예인이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 가격이 급등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부동산이 ‘어떤 연예인의 소유다’라는 사실이 공표되고 나서는 연예인 프리미엄을 톡톡히 본다고 할 수 있다.

땅값이냐, 몸값이냐

요즘 방을 옮겨볼까, 고민 중이다. 좀 큰 원룸이나, 합리적인 투룸 정도로. 돈이 없어서 올 전세는 힘들고, 보증금 조절한 월세 정도로. ‘연예인 부동산’ 같은 곳은 엄두도 못 낸다. 생각날 때마다 매물 검색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은 자신의 가치, 즉 몸값이 자기 부동산의 땅값에 영향을 미치는데, 나 같은 일반인들은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내가 거주할 수 있는 땅값이 내 몸값을 결정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 얼마 전에 대학 동기들과 송년회 겸 만난 술자리에서 근황 이야기를 하다가, 동기 부부 네가 반여동에서 양정으로 이사를 했다길래, 난 아직 남천 쪽에서 지낸다고 했더니 “야, 거기 부자 동네잖아.”라는 얘길 들었다. 어이, 난 1000-38 원룸이라고…

그러니, ‘어디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그 사람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오랜 상식인 셈이다. 그 상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 살고 있는 곳의 땅값으로 자신이 평가받지 않고, ‘단지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땅값 상승을 이뤄낼 수 있는 사람, 연예인 정도의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는 땅값 대신 몸값을 올리겠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2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아, 나는 언제 으리으리한 곳에서 살아보나’ 그리고 곧이어 ‘아니, 내가 어디에 있는 나만 으리으리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정신승리하면서.’ 2가지 생각 모두 애처롭긴 매한가지였으나, 기왕이면 후자를 선택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땅값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내 몸값을 내가 하기에 달린 거니까. ‘통제 가능한 것에 대해서 선조치하라.’ 매우 현실적인 처세술 중 하나 아닌가.

조만간 이사를 가기는 할 것 같다. 2018년, 내 인생의 가장 치열한 1년을 시작할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기도 하고, 짐이 너무 많아진 지금의 방을 그냥 대청소하기엔 뭔가 손해보는 기분(?)도 들어서다. 이사 겸, 대청소 겸, 뭐 겸사겸사. 아주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최선의 방을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겠지. 몇 억, 몇 십 억짜리 ‘연예인 아파트’ 같은 곳은 아예 내 선택지에 있지도 않겠지. 어느 동네 땅값, 아파트값이 몇 천이 오르든 나와는 무관한 일이겠지. 어쩔 수 없이, 나는 고만고만한 다른 방으로 내 한 몸을 옮겨가겠지만 나는 내 몸값을 올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 존재의 값. 1평도 채 되지 않는, 작고 작은 내 존재의 값이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만족스러울 수 있도록. 누추한 단칸방에 있어도 초라하지 않고, 펜트하우스에 있어도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도록. 아,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