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나사

두치와 뿌꾸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스마트 폰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PC에도 지금 같은 검색 플랫폼이 다양하게 구축되지 않았었다.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매체는 TV였다. 그런 덕분인지, 그 당시엔 각 연령대를 위한 프로그램이 나름 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유튜브나 페이스북으로 영상을 찾아보는 요즘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 당시의 아이들은 TV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쪼르르 TV 앞에 모였고, 다음 날 학교에선 어제 본 만화영화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황금로봇 골드런, 가오가이거, 녹색전차 해모수, 그리고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했던 디즈니 만화 동산… 그 밖에도 기억에 남아있는 많은 만화들. 그 중에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만화는 ‘두치와 뿌꾸’다. “한치, 두치, 세치, 네치, 뿌꾸 빰! 뿌꾸 빰!” 중독성 있는 노래도 좋았고 드라큘라, 미라, 늑대인간, 마빈 박사, 프랑켄슈타인까지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캐릭터들도 좋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프랑켄슈타인인 몬스를 좋아했다. 어눌하고 느린 목소리, 착한 성격, 못 박으려다 벽을 허물어버리는 초인적인 힘, 그리고 늘 왼쪽 관자놀이에 박혀있던 커다란 나사.

나사 풀린 놈

그래서, ‘두치와 뿌꾸’를 보고난 후로 ‘나사 풀린 놈’ 이란 표현을 들으면 늘 몬스가 떠올랐다. 주로 엄마가 보시던 아침 드라마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아침 드라마엔 늘 재벌 회장님이 등장했고, 그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아들이 있었고, 수시로 회장님은 자기 아들을 ‘얼간이 같은 놈, 나사 풀린 놈, 못난 놈’ 등으로 부르곤 했으니까. 하지만 드라마 속 ‘나사 풀린 놈’들은 몬스처럼 착하지도, 말투가 어눌하지도 않았다. 표독한 눈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그 ‘나사 풀린 놈’들은, 그래서 내겐 몬스와 달리 별로 정이 가는 캐릭터들은 아니었다.

보통은 저기 어디 정신을 놔두고 다니는 사람처럼 중요한 걸 까먹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멍한 상태로 있는 사람을 두고 ‘나사가 풀렸다’고 표현한다. 애초에 ‘느슨하게 둬야 할 나사’ 같은 건 없으니까. 나사란 건 단단히 조여서 뭔갈 고정시키려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 ‘정신머리’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박혀있는 나사건 간에 풀린 나사는 조여야 마땅하다. 특히나 이 험난하고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더더욱.

나사 조이는 방법

나사를 조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사 대가리의 홈에 십자드라이버를 잘 맞춰 끼우고, 돌리면 된다. 오른나사는 오른쪽으로, 왼나사는 왼쪽으로. 진득하게, 단단히 조여져서, 더 이상 드라이버가 돌아가지 않을 때까지. 그런 점에서 ‘생활의 나사’, ‘정신머리의 나사’를 조이는 방법도 꽤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다. 해야할 일을, 정해진 루틴에 맞춰, 꾸준히 한다. 억지로 하던 일이 어느새 몸에 배어서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될 때까지. 그러고 나면, 적어도 그 일에 대해선 ‘나사 풀린 짓’ 을 할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운동선수들의 훈련 루틴, 작가들이 창의적인 작업물을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는 것, 수험생의 하루하루, 이 모든 것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나사를 조이는 일’일 테다. 길이가 긴 나사일수록, 더 오래, 정성 들여 나사를 조여야 하겠지. 어쩌면 완전히 조이기 위해 평생이 걸리는 나사도 있겠지. 삶처럼 복잡다단한 것일수록 단순한 비유에 빗대면 어쩐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곤 한다. 그러니까 나사의 비유에 따르면, 삶이란 건 ‘겨우 나사를 조이는 일’ 인 것이다.

가끔 헛도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나사 조이는 그 단순한 일도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조립식 책상이나 옷장 같은 것들을 한 번이라도 만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열심히 조이기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충분하다고 생각될 때, 멈추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걸. 다 조인 나사를 억지로 더 조여봤자 나사 대가리의 홈이 뭉개지고, 나사 구멍에 상처 나고, 힘 쓴 보람 없이 드라이버가 헛돌기만 할 뿐이다.

우리네 삶에도 그렇게 헛도는 날이 자주 있다. 노력은 하지만 진전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때. 성취는 있지만 의미는 잃어버렸던 때. 최소한 ‘나사 풀린 놈‘은 아니라는 자기 위로만으로 겨우 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누군가는 슬럼프라고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그런 때.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아서 내 삶이 이따위인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믿지도 않는 신을 불러다 원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되더라. 어떻게 해야될 지 감도 안 잡히는 그럴 땐, 다시 가장 단순한 비유로 삶을 끌어오자. 당신은 나사를 너무 많이 조였다. 가끔 그렇게 나사가 헛도는 날이면, 잠시 멈춰보자. 어쩌면 지금 그 나사는 그대로 충분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프랑켄슈타인의 정체

다시, ‘두치와 뿌꾸’의 몬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프랑켄슈타인’ 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바로 그 괴물을 떠올린다. 초록색 피부, 각진 머리, 살조각을 기운 듯한 피부, 관자놀이에 박혀있는 나사. ‘프랑켄슈타인’은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달고 1818년에 출간된 영국의 작가 메리 셸리의 괴기 소설 제목이다. 자, 여기서 진짜 반전은 프랑켄슈타인의 정체가 우리가 아는 그 괴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죽은 자의 뼈에 생명을 불어넣어 괴물을 만든 물리학자의 이름이다. 그 괴물은 추악한 자기 존재를 만든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증오로 그의 동생과 신부를 죽이고,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을 쫓아 북극까지 갔다가 탐험대의 배 안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두치와 뿌꾸’ 속 어눌하고 착한 몬스와는 전혀 다른, 비극적이고 두려운 캐릭터다. 어쩌면, 그 괴물을 만든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나사를 조였던 것 아닐까. 광적인 그의 실험이, 결국 모두를 비극으로 끌고 간 괴물을 창조해냈다. 반쯤 풀린 나사를 관자놀이에 박고서 제 존재를 부정해야했던, 이름도 없던 그 괴물. 결국 대중들에게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자신의 창조주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으로 회자되어야 했던 그 괴물.

과유불급, 너무 조이는 것이든 너무 풀린 것이든 과한 것은 좋지 않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삶을 보면, 차라리 조금 나사 풀린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적어도 ‘풀린 나사’는 아직 더 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