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그 무수한 결에 대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집단에 따라 그 대답의 ‘결’이 달라지곤 한다. 학창 시절엔 “저 2학년 3반 김경빈인데요.” 라고 대답했고, 군대에선 “이병 김경빈” 이었다. 사회로 나와 보니, ‘어느 직장에 다니는 누구…’ 라고 해야 했고, 고향은 어딘지, 나이는 몇인지, 키는 몇이고 담배는 피는지, 주량은… 의외로 나는 꽤 많은 ‘사회적 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축적해가면서, 마치 거울처럼, 다른 누군가를 볼 때에도 막연히 추측되는 그의 사회적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옷차림이나 말투에서 추측하기도 하고, 단순히 외모로만 판단하기도 한다. 성격, 학력, 직업까지 그렇게 우리는 습관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기도 전에 “당신은 누구일 거야.”라고 규정하곤 한다. 실제로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머리를 9mm로 밀고 다니던 중고등학교 시절엔, 꽤 모범생 축에 들던 나를(반장에 학생회장까지 했는데…) 초면엔 소위 말하는 ‘일진’ 쯤으로 여기던 친구들도 있었다. 덕분에(?) 학창시절 누구한테 맞고 다닌 기억은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냐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그 진부한 말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는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공감대에서도 여전히 그런 진부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종에 따른 편견인데, 예를 들면 백인은 젠틀하다, 황인은 죄다 쌍꺼풀 없는 찢어진 눈이다, 흑인은 근육질에 예술적 기질이 뛰어나다, 하는 그런 것들.

물론 표본 조사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인종마다 그런 특성을 지닌 개개인의 비중이 높을 수는 있지만, 그 특성이 절대적인 편견이 될 수는 없다. 당장 우리 커플만 해도, 내 눈이 ‘황인의 전형적인 눈’ 인 반면에, 여자 친구의 눈은 쌍꺼풀도 있고 꽤 크다. 더군다나, ‘콩고 왕자’라는 별명으로 휴먼 다큐와 각종 예능에 출연한 적 있는 조나단과 라비 형제는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콩고 말은 물론이고 영어도 거의 할 줄 모르더라. 흑인 특유의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턱걸이는 1개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더라. 게다가 나이지리아 혼혈 모델로 활약 중인 한현민은(심지어 이 친구는 이름부터 한국인이다.) 영어를 배우는 예능에 출연해 ‘ON’을 ‘NO’로 읽기까지 했다. 아, 정말,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더라는 거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걸로 놀랄 시대는 아니야

뭐, 사실 나도 놀라긴 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사실 이런 걸로 놀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싶다. 피부색이 다른 이들과 한데 모여 살아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 아닌가. 다문화 인구의 수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의 약 4%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다문화 학생은 10만 명에 이르는 시대에,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단편적이고 편협한 사실에 발 묶여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런 경향이 있고 특히 대중 매체에서 그런 점들을 부추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델 한현민이 나이지리아 혼혈이라는 사실,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는데도, 그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무슨 ‘충격’ 이라거나 ‘의외의 사실’ 인 양 부추기는 것은 피부색을 통해 갖는 편견을 더욱 곤고하게 한다. 지금은 이다도시나 로버트 할리의 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비정상회담에서 10개국의 청년들이 한데 모여 한국어로 토론을 하는 이 시대에, 기존의 편견을 전제로 하고 접근하는 그런 방식의 방송 구성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의 결은 더 세밀하고 무수해서

고로 요즘 시대에 정체성이란, 그 결이 더 세밀하고 무수해질 수밖에 없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삶의 거처와 목적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해서, 이제 더 이상 서른을 넘긴 여성은 곧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그것도 기왕이면 수도권 대학으로, 그것도 안 되면 4년제 국립대라도 가야한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기 전에, 스스로가 갖고 있던 정체성의 틀로 그를 재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말을 뒤집어보면, 우리는 외부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을 선택해야할 필요가 없다. 스물엔 여행을 가고, 서른엔 취직과 결혼을 하고, 마흔엔 딸 하나, 아들 하나… 뭐 이런 인생 매뉴얼 같은 것을 따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형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결국 우리일 뿐이다. 정체성의 결은 더 세밀하고 무수해서, 어느 하나의 결만 콕 집어서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도 없고, 완제품으로 된 정체성을 하나 구입해서 거기에 맞게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저 사람에게 맡기자.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맡도록 하자. 허락을 구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자. 누가 내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거든, 한 문장으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상심하지도 말자. 대신에, 참 어렵지만 꼭 필요한 질문,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매순간 던지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