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살구처럼 살지 못하는가

<살구를 주우며>, 최영숙

살구는 자기가 살구인 줄 모를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지천으로 땅에 떨어질까,

살구를 줍는다

장마 끝 후두두 떨어진 내 마음의 살점

둥근 황금고리를 친 살구알이 여기저기 널렸다

상한 것보다는 흠집이 더 많은

이건 비바람의 상처, 천둥과 번개가 아문 자국이렷다

불주사 그 더운 열기가 속으로 익었다?

조카 두 놈이 작대기를 들어 가지 사이를 휘젓는다

아파라, 때때로 내 마음 아닌 마음 매 맞는 것 같아

검은 구름 몰려가 터진 사이로 날아가는 새떼들같이

맑은 하늘 촘촘히 매달린 살구알 올려다보며

아이야 그만 내치라,

장마물에 신맛 단맛 다 빠진 살구는 그러나 싱겁고

늘 남들보다 한수 늦게 웃고 우는 내게

아차, 이 녀석

가지를 쳐도 덜 익은 건 안 떨어진다, 한다

익은 건 떨어져도 안 익은 건 가지를 꼬옥 잡고 있는다, 한다

투둑,투두둑, 살구가 구르다 멈춘 자리

결국 내가 잡아온 생이란 가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마음의 진신사리를 여기서 본다

불에 덴 자리 시커먼 속에서 더 향내 나는지

어떤 건 개미떼 까맣게 줄을 섰는데,

살구는 아마 자기가 살구인 줄도 모를 거라

모르면서 그렇게 한여름 익어가고 있는 걸 거라


시인이 살구를 줏으며 느낀 감정을 나도 그 과일을 경험하고 있을 때 비슷하게 느낀 적이 있다. 살구라는 과일을 먹기만 하다가, ‘살구’라는 과일 안에 들어있는 작은 우주랄까, 너무 거창하지만 어떤 가르침 같은 것이다.

사실 그 어떤 것의 과일, 과실, 열매가 되었든 그런 것들을 보면 참 신비롭다. 동글동글한 열매 안에 온 우주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벅찬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들은 줄곧 이런 열매를 보고서 생명을 노래하기도 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했구나


아버지 친구 분의 농장에 따라간 적이 있다. 대학시절 운동권, 그리고 그 후 농민운동까지 확실한 자기고집과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고 계신 꼿꼿하신 농부셨다. 농부의 삶을 위대하다고 처음 여기게 하신 분이었다. 아마 알파고가 농업에 진출해도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실 독보적인 농부일 것이다. 그런 그 분과 함께 살구밭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 최영숙 시인처럼 시를 쓰거나 글을 쓰진 못했지만, 살구의 인생스토리 자체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가지를 쳐도 덜 익은 건 안 떨어진다, 한다

익은 건 떨어져도 안 익은 건 가지를 꼬옥 잡고 있는다, 한다

투둑,투두둑, 살구가 구르다 멈춘 자리

결국 내가 잡아온 생이란 가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개살구는 욕심으로 뜯어먹기 때문에 욕을 먹는다. 그럴듯해보여 따봤더니 떫다. 개살구는 스스로 내려온 적이 없다. 그 긴 시간을 홀로 스스로가 만족하는 시간만큼 절대 내려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툭 쳤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툭하고 떨어진다. 그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아저씨의 말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잘 익은 살구를 구분하는 방법이었다.

“잘 익은 살구는 잡고 흔들었을때, 씨앗이 과육에서 떨어져 있어서 딸랑딸랑하고 흔들리는 느낌이 들지.”

살구는 욕심이 없다. 먼저 떨어지는 법이 없고, 스스로 다 이룩하면 먼저 알아서 모든 것을 내어준다. 살구같은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선 빛 좋은 개살구로만 살고 있는 나를 반성한다. 완성되고 싶다는 욕망 조차도 내던지길 바라며, 살구를 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