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스름한 게 참 예뻤는데. 하얀민들레차.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맞는 건지, 나를 포함해 몇몇 친구들은 서울에 올라와 꼬마 티를 조금 씩 벗는 중이다. 모두들 부산 사람이라 혼자 지내는 일이 다반사. 가끔씩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한다.

우리들 각각의 자취방은 나름의 테마 혹은 특색이 있다. 내 집 같은 경우는 남자 혼자 사는 집 답지 않게 늘 좋은 향이 난다(자랑으로 쓴 건 아니지만 자랑이다). 그리고 요리를 할 수 없다. 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탓이다. 또 어떤 친구 집은 사람이 집을 어디까지 어지럽힐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을 해볼 여지를 주는 곳이고, 또 다른 곳은 누가 봐도 남자가 사는 집이라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아챌 수 있는 곳도 있다.

지금 이야기 할 곳은 벌써 10년도 넘게 친하게 지내는 어떤 친구의 집이다. 그 친구는 이것저것 사다 놓는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람이 주가 되어야 할 집에 잡다한 오브제들이 주가 되어버린 비극을 간직한 집이다. 게다가 입지도 않을 옷을 무지막지하게 사더니, 그 옷마저 둘 곳이 없어 온 집이 흡사 옷 창고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집이 어지럽혀 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게 그곳은 견디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자주 찾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집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 있다. 그 공간만큼은 늘 깔끔했고, 그 친구가 사다 놓은 오브제들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다. 조명도 내가 좋아하는 어두운 노란색이었다. 수십 단계 좋게 말하면 카페 같기는 했다.

그 친구가 사는 오브제들 중에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역시 찻잔이다. 차를 좋아하는 건지 찻잔을 좋아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그 찻잔에 걸맞는 몇 가지 차를 그 아늑한 공간에서 조용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은 서울에 많지 않다. 그런 은은하고 아늑한 공간은 많지만, 그렇게 조용하게, 우리끼리 떠들고 놀 수 있는 곳은 거기 뿐이다.

꼭 그 친구의 집에 갈 때는 혼자는 가지 않고 같이 가는 친구가 있다. 혼자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집에 처음 갔을 때의 조합이 괜찮아 그 친구 집에서는 늘 같은 셋이서 모인다.

내 집에는 커피만 가득하고 차는 정말 한 가지도 없다. 그 흔한 녹차조차도. 내가 그 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친구가 좋아해서 한가득 있는 하얀민들레차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이전에는 그런 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거기에 몇 번 다녀온 이후부터는 그 차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됐다.

직접 만들어 마시는 게 더 좋다고는 하는데, 사실 우리네들은 그런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그 친구도 티백 형태로 된 하얀민들레차를 가득 갖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그 친구가 갖고 있는 여러 찻잔 컬렉션 중에서 하얀민들레차의 노르스름한 색과 조명이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투명한 티팟으로 골라 차를 우려낸다. 그 과정을 구경하는 것도 이상하게 재밌다. 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인가. 투명한 티팟 속에서 노랗게 채워진 하얀민들레차는 정말 쓸데 없이 곱다.

아무튼 친구가 그렇게 차를 담은 티팟과 같은 세트의 찻잔을 가지고 그 좁지만 아늑한 곳으로 가져오면 사진부터 찍고, 맛을 조금 본 뒤, 그대로 세 시간, 네 시간을 내리 떠든다. 이상하게 커피는 많이 마시면 거부감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차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그랬는지, 친구가 한 네 번은 다시 차를 우려내러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한참 그 집을 찾을 때는 겨울이라, 감기에 탁월하다는 하얀민들레차를 그렇게 마셔 댔을 수도 있겠다.

요즘에는 그 친구 집에 잘 못 가게 됐다. 다들 매우 바쁘기도 하고, 날씨도 더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시 날씨가 선선해 지면 다시 그 친구 집에 다짜고짜 찾아가야 겠다. 거기서 마신 하얀민들레차 맛도 그립고, 그 공간도 그립고, 그 시간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