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어지지 않는 진심’ – 어묵

어묵 국물로부터

편의점이나 휴대폰 매장처럼, 동네마다 골목 어귀에 꼭 하나씩 있는 분식점. 흔히 ‘김.떡.순’이라며 김밥, 떡볶이, 순대를 분식의 대표주자로 말하긴 하지만 어떤 메뉴가 되었건 그 곁엔 항상 어묵 꼬치와 어묵 국물이 있었다. 약간 탁할 정도로 노오랗게 우려진 어묵 국물은 추운 속을 달래주고, 특유의 짭조름한 맛으로 국물 주제에 허기를 달래주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엔 용돈 몇 백 원 겨우 가지고서 어묵 꼬치 하나 먹고 어묵 국물만 몇 번이나 떠다 먹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 조그맣던 분식집의 주인아주머니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을 텐데, 그 시절엔 그래도 인지상정이 있었구나, 싶다.

어떤 음식점의 음식이 괜찮은지를 판단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반찬이나 메뉴를 먹어봐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중국집에선 짜장면, 국밥집에선 김치나 깍두기, 카페에선 아메리카노. 반쯤은 그냥 하는 소리 같고, 또 한편 반쯤은 그럴 듯한 소리 같은 이 방법을 눈 딱 감고 믿어본다면, 분식집을 판단할 때 반드시 먹어봐야 하는 것은 분명 ‘어묵 국물’일 것이다. 어묵 국물이 맛있어야, 그 어묵 국물을 간간히 육수로 부어 농도를 맞추는 떡볶이도 맛이 있는 법.

어떤 분식집은 국물에 꽃게, 대파, 양파, 무, 새우까지 아주 호화로운 자태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어떤 분식집은 정말 간소하게, 어묵 꼬치에 홍고추, 대파만 대충 썰어 넣어두기도 한다. 같은 어묵이라면 당연히 전자의 국물 맛이 훨씬 깊고 맛있겠지만, 가끔은 후자의 경우가 더 맛있어서 놀랄 때도 있다. 보통 그렇게 어묵만으로 국물을 우려냈는데도 맛이 있는 경우, 그 집의 어묵은 두말 할 것 없는 진짜 어묵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니까 사실, 앞서 했던 말을 정정하자면 분식집을 판단할 때 반드시 먹어봐야 하는 것은 분명 어묵, 그 자체인 것이다.

좋은 어묵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어묵 국물도 떡볶이도 결국 어묵으로부터 출발하는 셈인데 제대로 만든 어묵은 우려낼 만큼 국물을 우려내고 나서도 탱글탱글한 식감과 깊은 맛이 살아있다. 밀가루보다 어육을 더 많이 넣고, 야채, 고추 같은 부재료도 넉넉히 넣어 반죽을 한 어묵, 진심이 담긴 어묵이라야 가능한 일. ‘진심은 통한다.’는 말에 더해서 ‘진심은 아무리 통해도 옅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무리 국물을 우려내도 옅어지지 않는 ‘진짜 어묵’의 진심 어린 맛처럼.

길거리 분식집에 서서 500원, 700원 주고 간식으로 사먹던 어묵. 위생적으로 조금 지저분한 듯해도 ‘길거리 음식이 다 그렇지.’ 하며 대충 넘기곤 했던 어묵. 요즘 제대로 된 어묵은 이런 편견을 깨부순 지 오래다. 고추, 잡채, 치즈, 파프리카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해졌고 위생적인 첨단 설비로 여느 음식 제품보다 깔끔하게 제조된다.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 어묵이 원래 길거리 음식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어묵 볶음, 어묵탕, 김밥 속 재료까지, 어묵은 우리네 식탁에서도 반찬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때문에 요즘에 눈에 띄는 ‘어묵의 고급화’는 사실 어묵이 제 역할에 맞는 취급을 받는 ‘어묵의 정상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만든 어묵을 선물하거나, 그런 어묵으로 요리를 하는 것은 결국 진심을 선물하고 진심을 담아 요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길거리에 서서 호호 불어 먹던 그 정겨운 맛, 소주 한 잔의 쓴맛을 달래주는 위로의 맛,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우는 알찬 맛. 진심이 담긴, 제대로 만든 어묵의 그런 맛은 절대 옅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