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있어 줄래요,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당신.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에서 ‘당신’을 뒤로 뺐다. 저 제목을 이 글에 쓰고 싶은데 이미 영화 제목으로 알려진 터라 변화를 준 것이다. 사실, 제목 자체를 생각해냈다기보다는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 제목을 보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판을 두드리기로 했고 제목은 조금의 변화를 두어서 영화 제목과 차별을 두었다.

제목도 유명 영화의 그것과 비슷해서 흔하지만, 내용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세계적으로 새롭고 경이(?) 로운 이야기에 대한 것일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선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하거나 상상하던 바가, 또는 그토록 바라던 것이 온 주위에 만연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그토록 원하던 바가 우리의 그것이 아니라 국정 농단을 일삼은 자들의 그것이기에 씁쓸함은 우리의 몫이다. 즉,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그것들이 팽배해 있어 더 이상 특별나지도, 놀랍지도 않은 사건들. 굳은살 위에 굳은살이 박이고, 그 굳은살이 치료받지 못하고 아물지 않은 비수 꽂힌 곳을 강제로 덮고 있어 많이 아픈 사람들. 우리들.

불행해 보이던 사람들이 멋있어 보인다.

우리네 한국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기보다는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들. 행복함과 불행함도 주위의 시선에 따라, 비교에 따라 달라지는 곳. 뚜렷한 행복에 대한 자기 주관이 없는 우리들에게 행복이란 단어는 손에 잡히지 않는 어디에선가 누려지고 있는 무엇이라 생각하기 쉽다. 즉, 우리의 모습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고, 뚜렷한 행복에 대한 주관이 없고, 조건이 갖추어져도 그것을 누릴 여유가 없으므로 우리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출장을 와 방문한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를 따라다니며 보조를 하고 내 머리를 정성껏 감겨주던 젊디 젊은 한 청년. 헤어디자이너의 지시에 따라 조금은 어리바리하지만 스스로는 나름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려 노력하는 모습. 그 어리바리함과 빠릿하려는 노력의 격차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평소와 같으면 불쌍하고 안쓰러워 보여야 할 그 친구가 말이다. 어느 한 곳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아, 그래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구나. 지옥철에 갇혀 매일매일을 똑같이 시작하는, 원하지 않는 회식에 이끌린 후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그 속에 있는 나도,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우리 모두도.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살아내야 한다. 그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보통’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것을 깨달으며 우리는 어른이 되고, 또 바라지 않았던 일과 상황을 마주하며 인생을 배워간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박탈감과 상처, 그리고 집단적 공분을 선사한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나쁘다. 자신의 급여에서 50% 이상의 세금을 내면서도 행복지수가 높은 북유럽은 그 세금이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몸소 느끼기 때문에 행복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다. 그 믿음은 국민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공정함을 바탕으로 그 믿음을 준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종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솔선수범에서 오는 믿음이다. 우리는 불신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다시, 거기 있어줄래요 당신.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노점상을 보게 된다. 가끔은 그분들이 내어 놓은 저 물건들을 다 판다 한들 얼마나 가져갈까. 얼마를 벌게 될까…라는 오지랖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다 팔아봤자 노동력과 재료비를 제하고 나면 비싼 식당에서의 한 끼 정도도 안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미용실의 그 어리바리한 젊은 친구는 언제까지 저런 힘든 일을 할 것인가가 걱정스러웠다. 박봉일 텐데 말이다. 나도 다름 아니다. 월급쟁이란 파리 목숨을 가지고 언제 지옥에 내몰릴지 모르는 불안함이 가슴 한편에 있다. 1년을 열심히 일한 연봉은 어쩌면 부패한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겐 먼지와도 같은 금액일 텐데. 나도 참 안쓰럽다. 생각해보니.

그런데, 오늘 느낀 뭉클함은 오히려 이렇게 안쓰러워 보일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를 달리 보이게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노점상을 하는 분들에겐 그것이 ‘삶’이며, 어리바리하게 보이는 그 젊은 친구의 미래는 어느 누구보다 밝을지 모른다. 그 친구의 머리 속에는 이미 양쪽 허리춤에 반짝이는 가위를 차고 유명한 헤어디자이너로 우뚝 서 있을지도. 고생하는 것에 비해, 그리고 다른 회사와 비교해 언제나 작아 보이는 내 연봉으로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서 살아가는 순간들. 모든 것이 안쓰러운 것이 아니라 ‘신성한’ 그것으로 보였기에 뭉클함이 온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요소요소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가 있기에 세상은 굴러가는 것이고 유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와 다른 저 어느 곳에서 권력의 부패가 썩어 문드러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평소에 이런 말을 하면 무언가를 계도하려거나 꼰대와 같은 말일지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소소한 이야기라서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느낀 이 감정은 너무나 특별해서 오히려 그게 씁쓸하다. 당연한 것이 특별한 사회에서 국민적 ‘믿음’은 생겨나기 힘들다. 다만, 그럼에도 각자의 삶을 묵묵히 사는 사람들은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각자 꾸리고 가는 그것이 우리네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묵묵한 삶 속에, 언젠간 더욱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걸, 쉽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내야’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지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더 말하고 싶다.

거기 있어 줄래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