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목장

헝가리 출신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작가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1929-2016)는 그의 작품 운명(1975)으로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유대인 소년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와 부헨할트, 차이츠 강제 수용소 생활을 겪게 되는데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관점이 새롭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개인의 인간성이 말살된 수용소 생활과는 다르게 그 끔찍한 생활 속에서 “일상”을 유지해내는 주인공의 태도가 이 작품의 특이점이다. 그가 그려내는 죄르지의 수용소 생활은 언뜻 보면 편안하며 또 전원적이기까지 하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으로 들어가는 우리나라 청년들은 훈련소에 입소하는 그 순간부터 2년동안 간절히 전역을 꿈꾼다. 이토록 강렬했던 열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민간인”이라는, 그 당연한 신분 하나를 애타게 원한다. 그러나 막상 말년병장이 되어서 느끼는 감정엔 불안함이 섞여 있다. 당장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그 불안감이다. 때가 되면 끼니가 나오고 내일은 무엇을 할지, 모레엔 무엇을 할지, 이번주 주말엔 무엇을 할지 예상 가능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맥락이 같다. 군대라는 공간도, 구성원 개개인의 모든 일상을 직접 조율하고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잔존하는 또 하나의 수용소이니까. 그러나 특정 대상의 자유를 탈취한 국가권력을 나무라기 위해 이 글을 쓴 건 아니다. 자유를 억압당한 상태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존재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울타리가 있다고 떠올려 보자. 모든 사람에겐 그이를 둘러싼 일정 반경의 울타리가 존재한다. 울타리에 둘러 싸인 면적 또한 제각각이다. 이 면적의 넓이는 이 사람이 누리는 자유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또 울타리가 둘러싼 공간을 한 사람의 “세계”라고 칭해도 무방하다. 군복무중인 사람의 울타리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의 울타리는 좁다. 그래서 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울타리 둘레를 모두 인식할 수 있다. 그는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 나무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손으로 직접 만져 보기도 한다. 그러나 좁은 울타리 둘레 안으로는 그렇게 많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 더 넓은 바깥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답답함을 느낀다.

군대를 전역한 사람의 울타리를 생각해보자. 순식간에 넓어진 울타리의 끝은 너무 넓어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이 이 사람에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두렵다. 누구에게나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울타리가 중간에 끊겨 맹수가 들어오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누군가가 자고 있을 때 자신을 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울타리를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여정이, 그리고 무엇이 나올지도 모를 미래가 막연하고 두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곳에선 가끔 찬 바람이 불어오기도 한다.

큰 강제적 억압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울타리는 대개 굉장히 넓다. 후자의 경우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많이 두려워하고 겁먹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응하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드는 시간이 쌓이고 쌓일수록 어두운 저 곳에선 결국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냥 그것을 하나의 정경으로 두고, 자신이 보이는 곳 안에서 집을 지어 산다.

삶에 적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시간을 요하긴 하나, 아무리 넓은 공간에서도 우리는 결국 더 아담한 공간의 울타리를 직접 짓는 것이다. 작은 울타리 안에선 의외의 따뜻함이 맴돌며 그로 인해 꽃이 피고 바람이 숨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작은 공간이 자신의 울타리라고 생각하며 살게 된다. 점점 더 좁은 울타리를 짓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알랴, 착각으로 만든 울타리 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동정하는 슬픈 노래가 울타리 밖에선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