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 잠자의 시대

– 혐오라는 워딩을 사용하는 순간 미움의 숙주가 되어버린다. 무엇 무엇, 극혐. 장난 이래도 이런 표현을 즐겨 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그 행위가 진짜 혐오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야생의 진지 충이() 나타났다!

나는 어떤 경우에든 한 마리 벌레다. 한국 남자로 태어나 한남충이고, 경우가 아닌 일은 꼭 짚고 넘어가는 진지충이다. 벌레인 나는 벌레와 산다. 아내는 두 아이 엄마인고로 맘충, 아이는 커서 급식충이 되겠지. 내 부모님과 장인 장모는 머잖아 틀딱충에 들어선다.

벌레인지라 혐오 속에 산다. 잘잘못과 별 상관없이 미움받는 일 잦다. 성향이나 역할에 갖은 충이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생겨난 일이다. 어쩔 땐 행동하기도 전에 해당 포지션에 속한단 이유로 그냥 극혐이란다. 극도로 혐오.

국민 간 반목과 비난은 어느새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는데 언제부터 이랬는지 도통 모르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어보니 한 마리 벌레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임신한 아내와 시내 나들이라도 나갈 때면 얼마나 움츠려 들게 되는지 모른다. 아이가 조금만 보채도 누가 또 우리 가족을 벌레로 보지는 않을지 맘 졸인다. 일이나 생활에서 원리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선 뒤편의 다 들리는 수군거림을 감내해야 한다. 포털이나 커뮤니티 댓글란에 짐짓 진지한 태도라도 보이면 갖은 조롱이 날아든다.

직업 강사인 아내는 종종 중고등학교에 멘토링을 나가는데 친구들끼리 아무렇지 않게 온갖 호칭에 충을 붙여 부른다고 한다. 심지어 독서충이란 것도 있단다. 교실에서 책 읽는 모습이 재수 없다는 이유로. 교사는 담당 교과별로 물리충, 음악충, 영어충 같은 식으로 불리고 담임은 당연 담임충이다. 포스트 파브르 양성 기관도 아닌데 곤충에 관심 많은 학생이 참 많은 것 같다.

충의 기원

언제부터 어떻게 ㅇㅇ충이란 표현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정설에 가깝다고 통용되는 건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그는 죄를 지은 적 없지만 부족한 음악성으로 록 앨범을 냈다는 이유로 백만 안티를 감당해야 했다. 당시, 조롱의 의미로 ‘무뇌충’이라 부르던 것이 현재 갖은 충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는 거다.

웹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산업과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렌드 창출은 물론이고 사회 정서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익명성의 보장이란 특수성 탓에 규율과 규범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어려웠다. 성장은 가파랐지만 성숙이 설익어 탈 나곤 한다. 웹은 가능성을 제한 없이 발현 가능한 우주이기도 하지만 제한 없이 ‘아무 말 대잔치’ 펼치기에도 용이한 공간이다. 맘에 들지 않는 의견은 무시하면 그만이기에 자정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어렵다. 가볍게 뱉는 나쁜 말들이 제법 재미있다는 이유로 함의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복제된다. 충이란 말 역시 그처럼 퍼져나가 이제는 상황과 상대에 아랑곳없이 아무 데나 붙는 수식어가 되어 버렸다.

혐오의 결과

무작위의 무자비한 혐오는 역사 속 끔찍한 비극을 초래해 왔다. 히틀러는 유대인 혐오를 통해 나치의 결속력을 다졌고,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초래했다. 게르만 중심 정책을 통해 유대인은 그 존재 자체로 열등한 벌레처럼 취급받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국민이 겪어야 했던 시련 역시 다르지 않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자국 이외 민족을 벌레로 간주했고 731부대와 같은 생체실험까지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근원으로 작용했다. 상대 집단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장미 전쟁이나 십자군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발발했고 무수한 사람이 죽어나갔다.

한 번 혐오가 전이되면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무엇보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극혐이다. 독일이 나치 범죄에 대해 아무리 사죄해도 유대인들의 상처는 쉬이 달래질 수 없는 것이어서 보복 범죄로 이어지곤 했다.

문제는 혐오가 집단을 대상화한다는 데 있다. 개인의 인식과 인성은 들여다볼 여지없이 해당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견고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단위로서의 합의점은 찾아 나아가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획일적 혐오를 돌려주는 건 바른 태도가 아니다. 혐오로 받은 상처를 또 다른 혐오를 통해 달랜다면 끊임없이 혐오의 굴레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혐오의 잔재를 청산하는 건 피해자 입장에서 억울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똑같은 짓을 해서는 가해자와 다를 바 없어진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혐오는 집단을 나누어 진영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이 도화선 된 남녀 간 혐오, 촛불 정국과 맞닿아 더욱 심화된 세대 간 혐오, 성향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 간 혐오, 노동자과 고용주 간 혐오, 사제지간 혐오, 심지어 부모 자식 간 혐오까지. 점점 논쟁을 넘어 무분별한 혐오의 형태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맘이 무너진다.

이익이 상충되는 집단 간 갈등은 늘 있어왔고 당연히 있어야 존립을 위한 상호 합의점으로 나아가겠지만 혐오가 중심이 되는 순간 그 누구에게도 득 될 것 없는 가시덤불 레슬링이 되고 만다.

미움 극대화 장치, 혐오

혐오는 서로에게 한으로 남는다. 혐오라는 감정은 억울함에서 비롯된다. 일방적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면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를 혐오하게 된다. 문제는 혐오를 통해 분노를 드러내면 가해자 역시 피해의식을 지니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서로 혐오하며 종국에는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상처투성이의 서로만 남게 된다.

분노의 원인을 파헤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함이 옳건만, 불붙은 분노 앞에 사리가 흐려지면 무엇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심지어 원인 해결 후에도 추후 불거질 문제들을 우려하며 분노의 연료를 쥐어 짜낸다. 혐오가 미움 극대화 장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사 갈등은 사측과 노조의 합의점 도출을 위한 활성 요소로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노사에 속한 개개인은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여기 혐오의 프레임이 씌워지면 폭력이 동원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노조 소속이란 이유로 다른 이해 없이 눌러 죽여야 할 벌레 취급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조 입장에서도 사측 사람에 대해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쪽 새끼들은 다 똑같아.

노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면 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연장자를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꼰대로 바라보게 되고, 육아에 대한 혐오는 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버스 한 번 타는 것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혐오가 맹목성까지 띄게 되는 순간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 안의 견고한 혐오 속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고야 만다. 실수 한 번 잘못하면 평생의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사과를 해도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혐오는 타인의 취향이나 소비에도 관여하며 각자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다. 스타벅스를 애용한다는 이유 하나로 허세에 찌든 철딱서니 여자 취급을 받는다거나 유부남이 비상금을 모아 취미생활에 사용하면 이기적이고 책임감 없는 가장이 되어 버리는 식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에도 그야말로 아몰랑, 너는 어쨌든 그런 부류야, 하며 낙인을 찍고 혐오를 드러낸다. 그런 혐오를 보내는 자신이야말로 혐오스러운 괴물이 되어감은 모른 채, 나는 다 옳다는 애처로운 자기만족에 갇혀.

 

혐오의 워딩

재미 삼아 사용하는 속어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다만, 그 형태가 요즘처럼 무시무시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학생들을 부를 때 중고딩보다 급식충이 익숙해졌다는 건 혐오가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우리 일상에 파고들었는지 나타내는 사례다. 심각한 건 이런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건네면 고리타분한 진지충, 선비충 취급받기 딱 좋다는 거다. 그냥 장난이에요. 아무 뜻 없어요. 아무 뜻 없는 말은 세상에 없다. 하물며 감탄사 하나에도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다. 뜻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한 단어 사용 하나가 없던 혐오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거다. 학창 시절 조퇴를 위해 거짓 아픔을 꾸며내다 진짜 병이 생긴 경험처럼. 아프다 하면 아파지고, 기쁘다 하면 기뻐진다. 혐오라는 워딩을 사용하는 순간 미움의 숙주가 되어버린다.

무엇 무엇, 극혐. 장난 이래도 이런 표현을 즐겨 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그 행위가 진짜 혐오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탕수육 부먹 극혐.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계속 쓰다 보면 어느새 탕수육 소스를 붓는 사람 자체를 이해 못할 반대급부로 여기게 되고, 실제로 누군가 탕수육 소스를 자신 눈 앞에서 붓는 순간 짜증이 치고 올라와 필요 이상의 화를 내게 된다. 부먹이 설령 배려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해도 그걸 혐오까지 해야 할 수준일까? 담가 먹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부먹 극혐’이란 워딩에 물든 상태라면 그저 부었다는 사실 자체로 상대에 대한 미움이 생겨날 수 있다.

말이 바뀌면 맘이 바뀐다

혐오가 정말 최악의 단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 혐오에는 소름 돋도록 싫고 절대적으로 미운 정서가 깔려있다. 싫은 것들에 대해 적어도 이해하는 맘을 가질 수 있고 미워도 다시 한번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볼 수 있지만, 밉고 싫은 혐오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일단 혐오가 되고 나면 상대가 무얼 하든 다 맘에 안 든다. 혐오의 끝에는 극혐이 있을 따름이다. 혐오가 심해질수록 극이 계속 붙는다. 혐오했던 원인이 개선되어 상황이 나아진다 해도 미워하기 위한 혐오만 남아 어떻게든 싫어할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혐오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거다.

미워하는 감정 자체는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싫은걸 억지로 좋아하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 부정과 긍정의 감정은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역경을 이겨냄으로써 인생은 극적인 영화가 된다. 하지만, 혐오는 사랑이 피어날 토양 자체를 썩게 만드는 고약한 오염물질이다. 한 명의 상대를, 상대가 모인 집단을, 무엇보다 스스로를 좀먹게 된다.

무작정 아량으로 모든 상황과 사람과, 그 어떤 것들을 감싸 안 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필요 이상의 혐오를 키우지는 말자. 적절히 미워하고 적당히 싫어하며 알맞은 틈을 마음에 열어두면 좋겠다. 혐오로써 이해와 타협의 시도를 원천 차단한다면 무엇을 혐오하든 그것의 개선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정말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혐오부터 거두어내야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건 진짜다. 일단, 단어부터 달리 쓰자. 친분 깊은 사이에라도. 설령 농담으로라도.

혐오가 담긴 말을 거두어낸다면 훨씬 분위기가 좋아질 거다. ‘ㅇㅇ충 극혐’ 이런말보다 ‘ㅇㅇ같은 행동은 정말 미워’,’ㅇㅇ타입의 사람 겁나 짜증’ 차라리 이런 게 낫다. 분류 기준이 큼직한 집단 전체를 두고 싸잡아 충과 혐을 붙이는 건 실례는 물론이고 과오가 될 수 있다. 세상엔 벌레만 못한 인간이 분명 있고 혐오라는 감정이 정당해보일 정도의 경우도 있지만 흔하게 유행어처럼 가져다 붙일만한 표현은 결코 아니다.

사막화를 방지하는 염생식물. 말을 여기에 빗대고 싶다. 건조와 염류로 오염된 토양을 복구하는 생명력 강한 식물이다. 말은 그처럼 말라서 쩍쩍 갈라져가는 정서를 기름진 땅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말을 바꾸면 맘이 달라지기 때문. 요즘 우리는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혐오 워딩에 노출되고 있는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한 번 곰곰이 짚어보기 바란다. 아무렇지 않게 쓰고 뱉는 말들이 과연 아무에게나 사용해도 될 만큼 정상적인 것들인지.

자기 안의 혐오를 거두어내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우습게 벌레라 부르기 시작한다면, 종국에는 그 어떤 벌레보다 징그러운 괴물로 변신해 있는 스스로와 마주하게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