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편한 자유를 주세요

그러니까 그게. 6년 전 이맘때였다. 수능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몇 주, 7시 반부터 11시. 내가 온전히 자율적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모든 시간은 ‘자율’학습이었거든. 정말이다. 나는 무슨 수업이든, 무슨 시간이든 개의치 않고 수능을 공부할 자유를 얻었다. 한국지리 시간에 수리 영역 문제를 풀 수 있다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아이고, 자유롭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양 손에 컴퓨터용 사인펜과 수능특강 문제집을 나눠 들고 자유의 여신상 포즈라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내게 주어진 자유는 딱 그 정도였다. 수능과목들을 선생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공부할 자유. 그 밖의 것을 택할 권리나 권한은 없었다. 책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글을 쓴다던가 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자율은 자율주행 자동차의 자율 수준도 되지 못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내비게이션을 따르느냐 뿐이었다.

그 밖의 영역에서의 ‘자율’이라고 뭐 별다를 게 있을까. 고등학교 끝무렵에 통과된 학생인권조례 또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두발과 복장의 자율화가 이루어졌지만 얻게 된 것은 고작 몇 cm 더 기를 수 있게 된 머리와 조금 자유로워진 바지 사이즈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겠지만. 염색이나 펌 같은 건, 교복 위에 걸치는 패딩 같은 건 여전히 택할 수 있는 자율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정말 고등학교 끝무렵이라, 이마저도 나는 누리지 못했다.)

대학은 정말 자유로울 줄 알았다. 머리와 복장은 자율적이긴 했다. 교복점검을 하는, 머리카락 길이를 재는 학생주임은 없었으니까. 공부도, 과제도 수업을 선택하는 일도 꽤 자유로워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중 진짜 자유가 몇이나 될까. 결국 학생은 평가 받는 위치에 놓여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과목? 글쎄, 성적 더 잘 나오는 과목이 낫지. 결국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언제든 자율적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사회에 나왔다. 비교적 창의성을 요구하는 직종에서 밥을 벌어 먹어야 했다. 기획안을 써야 했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학교에서 누려본 자유라고는 야자와 12mm와 18mm 중 어느 쪽으로 밀 것인가가 유일했던 내게 더 자유로워지라는, 더 자율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독창성을 추구하라는 요구가 날아들었다. ‘자율적인 노동과 창의적인 결과물’. 그리고 거기에는 전제가 있다. 상사/고객/타인의 마음에 들게 할 것.

그 요구를 수행하지 못하면 이런 비난을 받는다. 아니, 그것 하나 알아서 못해서 말이야.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너는 왜 그렇게 자율적이지 못하니. 쉽게 말해 나는 귀찮고 책임지기 싫으니 일도 니가 하고 책임도 니가 지라는 얘기였다. 거기에 대고 굳이 자율적인 인간이 되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따지지는 않았다. 다만 침묵의 대가로 나는 강요된 자율 안에서, 자율적인 척, 정해진 답을 열심히 유추해야 했다. 그게 사회에서 말하는 자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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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자율도 그 자체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서, 세상은 창조와 창작, 자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창조경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미래창조과학부, 창의인재전형, 창의행정과 같은 말들이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 정도로 창의적인 결과를 내놓는다면, 각종 재단의 지원과 사회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원과 관심을 받기 위해 많은 청년들은 스스로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깎고 다듬었다. 그 결과물에 따라오는 말은 대개 이렇다.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창의성이 없어. 우스운 이야기다.

정말 창의적인, 자율적인 (인재 말고) 인’간’을 원한다면 그런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창조경제의 결과물은 대체로 그 창조성을 착취하는 이들에게로 돌아간다. 그 창조성을 판매하는 마켓을 보자. 소위 재능을 판매한다는, 프리랜서와 그 재능의 구매자를 이어주는 온갖 사이트들. 그곳에서 후려쳐진 창의성의 가격들은 대개 이렇다.

일러스트레이트 하나에 5,000원. 워드프레스 홈페이지 하나에 5,000원, 보도자료 하나에 5,000원,

시간당 최저임금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되는 창의성이 부지기수인데, 과연 누가 부러 창의적이려 노력하겠는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런 싸구려 창조에 매달리는 것보다 편의점이나 PC방에서 알바를 하는 게 훨씬 더 나은 값을 받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창조경제를 통해 창의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보장 받을 수 있다면 더 자율적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그 창조를 위해 내가 투입한 노동만큼의 값을 받는다면, 그 값을 받고 생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다면, 그 창의성을 통해 스스로가 빛나고 행복할 수 있다면 더 창조적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진 창의성을 억누르거나 과도하게 포장할 뿐이었던 교육의 역할도 이 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이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것. 그들이 가진 가능성을 열어주고, 빛나게 하는 것. 사람들의 재능을 애써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었던 교육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를 위해서라면, 우리 사회의 교육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이 지향해야 할 바는 명백하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창의력이 넘치는 인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창의성과 가능성을 뒷받침해줄 사회 시스템 안에서만 오로지 빛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떠들던 말이 있다. 파브르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잠깐 나오고 말았을 거란 얘기.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대학자퇴한 부적응자가 됐을 거라는 얘기.

그들이 빛날 수 있던 건 그들의 재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재능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누구 말마따나, 사람들이 자율적이었으면 좋겠다.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면 좋겠다. 적어도 자율주행자동차보다는 말이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싶고, 멈추고 싶을 때 멈췄으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지 않았으면. 그렇게 마음껏 움직이기를, 사회가 권장하고 또 지원했으면 한다. 그 끝없는 움직임의 결과로, 다이나믹 코리아든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든 될 수 있는 거 아니겠나.